▷ ①Or purification offering; here and throughout this chapter
▷ ①The Hebrew word can refer to either male or female.
레위기 4장, 속죄제를 드리는 규례
죽음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공통분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문제가 발생한 기원에 대한 기록이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로마서 8장11절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를 믿는 자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신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물을 회복시키는 죽음입니다. 사도행전 3장21절을 보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죽음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 사람은 죽고(롬6:6) 새 사람을 창조하는 죽음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죽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죽음임과 동시에 이 우주를 구원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는 개인의 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흔들어 놓은 죄가 되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죄는 한 사람을 죽인 살인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땅의 저주를 받게 하는 죄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이라는 것, 땅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으로서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분리될 수 없는 생명유기체입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과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이 그 사람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인으로서 사람이 이 하늘과 이 땅에서 생명유기체로 사는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창조물인 그리스도인과 생명유기체가 됩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이 세상의 땅에 발을 딛고, 이 세상의 하늘을 지붕 삼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땅과 이 세상의 하늘이 주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땅에 발을 딛고, 새로운 하늘을 지붕 삼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땅과 그 하늘은 어떤 곳입니까? 주님의 용서가 있는 땅이고, 주님의 죄사함이 있는 하늘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오늘, 하늘 평화를 맛보는 것입니다.
본문은 속죄제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규례를 보면, 짐승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하나 영적의미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의미 중에서 4절을 보면,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안수한다는 것은 죄를 짐승에게 전가(轉嫁)시키는 것입니다. 전가라는 것은 죄과(罪科)와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짐승에게 안수함으로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의 죄가 짐승에게 전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람과 이 우주는 생명유기체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 의문이 풀립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이 우주를 흔들어 놓았고, 가인의 범죄가 땅의 저주를 받게 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범죄가 이 우주에, 그리고 이 땅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사람의 범죄가 이 우주에, 이 땅에 흘러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사람의 범죄는 짐승에게 안수함으로써 전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짐승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죄과와 책임이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짐승의 희생제사 속에서는 안수함으로써 죄가 전가되었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믿음으로 나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됩니다.
죄라는 것은 히브리어 원어에서는 ‘하타’ 라는 것이고, 헬라어 원어에서는 ‘하말티아’ 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빗나갔다’ 는 것입니다. 즉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맞추지 못하고 탈선한 모든 것이 죄에 속합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서 탈선한 상태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상상하기 힘든 참상이 발생합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레일을 벗어나서 상상하기 힘든 참상이 발생한 상태,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 참상은 이 세상에서 이미 드러난 상태이고, 그 참상의 끝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질병과 전쟁과 가난에 노출되어 있고, 수많은 사회적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 오늘도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이 목전(目前, 당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세워지게 된 것이 희생제사라는 것입니다.
레위기에는 5가지 제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번제에 대한 것, 소제에 대한 것, 화목제에 대한 것, 속죄제에 대한 것, 그리고 속건제에 대한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번제의 제물로서, 소제의 제물로서, 화목제의 제물로서, 속죄제의 제물로서, 그리고 속건제의 제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번제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인간은 유죄이며 하나님은 성결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소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유일하게 피 없는 제사인데,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의미하며(엡4:13) 그리스도인의 ‘성화’ 와 관련된 제사(롬12:1)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 자신과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속죄제는 제사장과 이스라엘 회중, 족장과 평민이 죄를 범했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속죄제의 피는 죄로 더럽혀진 성막을 깨끗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죄사함을 통해 나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속건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 문제 해결 및 보상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대가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따라 어떤 제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라는 것은 ‘우리의 범죄의 내용이 무엇이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서게 만드는가?’ 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단 교주들은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이단 교주는 자신을 성령하나님이자 예수그리스도, 동시에 사도요한이라고 속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행하고 있는 것은 속이는 일과 자기 영리를 취하는 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단 교주들은 이미 자연사(自然死)했거나 앞으로도 많은 이단 교주들이 사고로 죽거나 자연사(自然死)로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자연사(自然死) 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받고 죽으셔서 하나님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늘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중에서도 이 시간은 속죄제의 규례를 통해서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속죄제의 규례에서 우선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릇 범하였으되’ 라는 것은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라 연약한 본성 때문에 실수로 지은 죄, 곧 부지중에 지은 죄입니다. 고의적인 범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민15:30-31, 히10:26-29, 요일 5:16)
오늘날 고의적인 범죄는 성령훼방의 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말로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죄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촉구하는 성령을 거역하면 고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속죄제를 드릴 대상에 해당함을 뜻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사람이 제사장이든, 이스라엘 온 회중이든, 족장이든, 평민이든 속죄제를 드릴 대상에 해당합니다.
오늘날로 얘기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속죄제를 드릴 대상에 해당합니다. 로마서 3장10절에 따르면, ‘의인은 하나도 없다.’ 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누구든지’ 범죄를 하면 속죄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의 시대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렸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구속의 은혜에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자가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속죄제를 드리게 되는 경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의 범죄입니다. 3절을 보면, 제사장의 죄가 성립하는 요건은 그 죄가 백성의 허물이 될 때입니다. 즉 제사장의 죄는 제사장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그것이 백성의 허물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입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라는 것은 집단의 범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공동체로서 범한 죄를 뜻합니다. 처음에는 그 범죄를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죄에 대해서 나중에 공동체가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공동체로서 그 죄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죄라는 것이 개인의 죄도 있지만 집단의 죄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죄도 있지만 교회자체의 죄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족장의 범죄와 평민의 범죄입니다. 22절과 23절은 족장의 범죄에 대해서입니다. 27절과 28절은 평민의 범죄에 대해서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이라는 단서가 붙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지중에 범한 죄의 특징입니다. 부지중에 범한 죄는 고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결국 속죄제를 드려야 되는 경위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는 개인의 생각과 관련 없이 그것이 공동체에게 허물이 될 때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또 하나는 범죄에 대해 깨닫게 될 때 개인이든 집단이든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정욕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됩니다. 이 범죄를 깨닫게 될 때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간통이나 성폭행은 공동체에 허물을 남기는 죄에 속합니다. 간통은 가족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에 속하고, 성폭행은 그 피해 당사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사회전체를 파괴하는 범죄에 속합니다. 이처럼 공동체에 허물이 되었을 때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각만으로 범한 죄든, 행동을 통해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든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죄사함은 속제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속죄제물이 각기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제사장의 범죄인 경우는 흠없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았고, 14절을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에 대해서는 그냥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한 사람이 범한 죄와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가 범한 죄를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한 것인데, 엄밀하게 보면, 제사장 한 사람의 죄를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 보다 조금 더 무겁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범죄에 대해서는 흠없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았지만,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에 대해서는 그냥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족장의 죄에 대해서는 흠 없는 숫염소를 속죄제물로 삼았는데, 28절을 보면, 평민의 죄에 대해서는 흠 없는 암염소를 속죄제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개인이라 하더라도 일반인 보다 대표성을 띄는 사람의 죄를 더 무겁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죄제의 규례를 통해서 그 영적의미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피의 제사에 대한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범죄자는 자신의 생명 대신 이 대속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22절을 보면,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속죄제를 드릴 때, 대제사장은 성소의 휘장 앞에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리고 그 피를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피의 제사만이 죄인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완전히 개척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히브리서 10장20절을 보면,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를 뜻합니다. 일곱 번 뿌린 다는 것은 대속의 피로 인한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은 완전한 용서이지만 다시 시간이 지나면 죄가 생각나는 불완전한 제사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제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인간을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되, 단 한 번으로 그것도 영원한 죄사함, 더 이상의 속죄 사역이 필요치 않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히10:4)
7절에 피를 향단 뿔에 바른다는 것은 구속의 은총과 구원의 능력을 대망하며 승리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뿔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속의 은총과 구원의 능력을 대망하면서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께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7절 하반절에, 피를 번제단 밑에 쏟는 것은 거룩한 피가 부정한 데로 노출되지 않게 한 조치입니다. 중세시대 때는 성만찬을 거행할 때 만일 사제들이 실수로 잔을 바닥에 쏟게 되면 그것을 핥아 먹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피를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속제제물을 처리하는 장소에 대한 것입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말씀합니다.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에 속죄제물 곧 성물을 처리해야 합니다. 제물의 기름진 부위가 하나님께 바쳐지고 나머지는 진 바깥 정결한 곳에 소각시켰듯이, 이러한 율법에 따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히13:10-13)
셋째는 두 콩팥과 기름을 드리는 것에 관해서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콩팥(신장)은 생명, 혹은 영혼, 감정이 깃든 곳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분과 더불어 콩팥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생명전체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피의 제사와 더불어 고난 속에서 생명전체를 드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제를 드리는 규례, 곧 율법과 견주어 살펴 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율법대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레위기의 율법 곧 번제의 제사, 소제의 제사, 화목제의 제사, 속죄제의 제사, 그리고 속건제의 제사를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번제의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오늘날 죄인인 우리는 성결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소제의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리셨기에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속죄제의 제사를 드리셨기에 진홍같이 붉은 나의 죄가 깨끗하여 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속건제의 제사를 드리셨기에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범죄하며 빚을 지고 있지만, 이 범죄로 인해 멸망당하지는 않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이 말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존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없고, 저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나님과 화평하는 일이고, 저 세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나님과 화평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도 고통 받고, 저 세상에서는 영원한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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