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2일에 sns에 어떤 사람이 이런 슬픈 사연을 올렸습니다.
자기가 아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암에 걸렸는데,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래 하든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님께는 부담이 될까 연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혼자 힘들게 견디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죽기 전 까지는 그의 부모도 자식에게 그런 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의 가까운 친구도 전혀 몰랐습니다. 주변에 그를 알고 있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물론 그는 질병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죽은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기는 혼자라는 사실, 이 고독감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런 사건뿐이겠습니까? 학생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폭행’을 당하다가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그 학생이 자살한 이유는 ‘왕따’를 당했고, ‘폭행’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학생이 자살한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 학생이 자살한 이유는 자기는 혼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고독했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 자식에게 버림받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식에게 폭행당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건도 있습니다. 이 분들이 자살한 이유는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 폭행을 당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분들이 자살한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 분들이 자살한 이유는 자기는 혼자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독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고독, 외로움, 소외감 등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면역체계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도 저하시키고, 동맥경화, 신체 염증 유발, 학습 및 기억력 약화 등도 일으킨다고 합니다. 미물에 불과한 날 파리도 홀로 떨어져 있을 경우는 건강이 나빠지고 수명도 짧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기 바이러스 백신만 개발할 것 아니라 고독, 외로움, 소외, 무관심 등 정신적 질병에 대한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정신의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런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인간에게 있는 가장 원초적인 고독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스위스는 인구대비 우울증 환자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복지시스템, 가족을 중요시 하는 사회문화, 알프스 산을 가진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진 나라가 스위스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 많은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일본 홋가이도 삿뽀르에 ‘니세코 샤코탄’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니세코 샤코탄’ 은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다워서 해안국정공원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출입이 통제되고, 등대까지는 출입금지장소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적인 예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에게 있는 가장 원초적인 고독의 문제는 경제문제, 복지문제, 가족문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원초적인 고독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문제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는 ‘인간은 우주에 던져진 고아와 같은 존재’ 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원초적인 고독의 문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떠나 있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나는 모든 갓난아기들은 실존적으로 고독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유복한 집에서 따스한 어머니 품 안에 안겨서 태어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고독합니다. 그래서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숙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숙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만 우리 인생의 모든 울음을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힘써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나의 책망을 듣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듣다’ 라는 히브리 말은 ‘토케하’ 라고 합니다. ‘토케하’ 는 ‘향하게 하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말 중 ‘슈브’ 라는 말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슈브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는 뜻입니다. ‘슈브’ 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회개를 촉구할 때, 자주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사야 44장 22절에서 ‘슈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장 22절에서도 ‘슈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6장 1절에서도 ‘슈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는 말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지혜’ 는 ‘하나님의 책망’ 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 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책망은 비록 쓰지만 우리 영혼, 우리 심령에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 의 특성입니다.
본문에서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20절을 보면,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인다.’ 말씀합니다. 21절을 보면,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한다.’ 말씀합니다.
지혜가 부르는 소리의 특성은 아주 큰 소리, 곧 ‘아우성’ 과 같은 소리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부르는 소리의 특성은 어느 위치에서도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는 ‘아우성’ 과 같은 소리입니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음향시스템이 좋은 교회일수록 성도님들이 어느 위치에 앉아서 설교를 듣든지 명확하게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지혜가 부르는 소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르는 소리는 어느 장소에서 듣든지, 삶의 어느 영역에서 듣든지 명확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의 보편성입니다.
지혜가 부르는 소리는 어느 장소에서든지, 삶의 어느 영역이든지 명확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는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어떻게 보편적으로 드러나 있습니까?
시편 19편 1절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보여주는 보편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보여주는 보편적인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손으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은 곧 ‘하나님의 소리’ 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곧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 라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귀는 하늘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귀는 하늘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의 차별성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하지만, 과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로 보여 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하늘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 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다.’ 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 하늘은 단순히 ‘sky’ 그냥 ‘하늘’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여 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하신 일로 보여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 하늘은 어떤 하늘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입니다.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하늘입니다. 그를 믿는 자를 부르시는 하늘입니다. 나에게 소리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소리치는 하늘입니다.
하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만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처럼 길거리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는 크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끄러운 길목에서는 소리를 지르고 계십니다. 성읍 또는 마을 입구에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장소와 모든 영역에서 말씀하십니다.
루터가 경험한 첫 번째 종교적 체험이 이렇습니다.
1505년 7월,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슈토테른하임 마을 근처의 시골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천둥이 대지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움을 가르는 번개와 천둥소리와 벼락에 루터는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이 날 하나님은 루터에게 친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의 어둠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수 같이 퍼 붙는 소나기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지를 흔드는 천둥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을 가르는 번개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어둠, 억수 같이 퍼 붙는 소나기, 대지를 흔드는 천둥이 무엇입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루터를 부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루터를 부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루터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공간과 삶의 과정 속에서 항상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르고 계시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터에게는 하늘의 어둠이, 그리고 소나기가, 대지를 흔드는 천둥이, 어둠을 가르는 번개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그런 어둠이, 소나기가, 대지를 흔드는 천둥이, 어둠을 가르는 번개가 빨리 몸을 피해야 하는 단순한 자연현상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문에서는 어리석은 자, 거만한 자, 미련한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 하늘은 ‘sky’ 그냥 하늘입니다. 거만한 자에게 있어, ‘십자가상의 주님’은 단순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미련한 자에게 있어 ‘부활’은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있어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입니다. 겸손하게 주의 책망을 듣는 자들에게 ‘십자가상의 주님’ 은 나의 죄 때문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있어 ‘부활’ 은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듣고, 우리의 영혼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마음으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영혼으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지만 들을 수 없습니다. 광장에서 소리를 지르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시끄러운 골목에서,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소리를 지르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늘이 소리 지르고, 주님의 십자가가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 귀를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자연인들에게 이 세상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육신의 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주셨습니다.
23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영이 임할 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임할 때, 주님의 십자가가 속죄의 십자가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임할 때, 부활은 살아있는 소망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은 주님의 영이 내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신앙적으로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로 보여 지지 않습니다. 단순한 ‘하늘’ 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하늘이 우울하고 답답한 하늘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원망스러운 하늘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영입니다.
우리에게 부어 주신 영이 회복될 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로 보입니다. 우리의 영이 회복될 때, 우리 영혼을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우리 영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회복될 때, 길거리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회복될 때, 광장에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회복될 때, 시끄러운 길목에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회복될 때,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회복될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루터는 하늘의 어둠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어둠의 시간을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 어둠의 시간은 피로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무력감에 빠지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지는 시간입니다.
그 때 우리는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 조그마한 소리를 낼 힘도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번민과 고민만이 내 영혼을 감싸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은혜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피로감과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져 가장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는 가장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힘이 없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그마한 소리를 낼 힘도 없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번민과 고뇌만이 나를 엄습하고 있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때 가장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때 마다 하나님께로 돌이킵시다. 그 때 마다 우리 심령이 변화되고, 우리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하나의 중요한 문화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스마트폰으로 그 무언가를 합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스마트폰, 어떤 사람을 만나 얘기할 때도 스마트폰을 만지작합니다. 사실 어떤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눌 때, 불필요하게 스마트폰을 만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하면 상대방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스마트폰은 사람과의 교제와 사귐을 줄어들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맞은편에 있는 친구와 대화를 하는데, 스마트폰의 카톡으로 문자를 주고받습니다. 마치, 문자만 필요하지 말은 필요 없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사귐이 이러한데, 하나님과의 사귐이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옆에 사람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 곁에 하나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다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하면서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급히 출근하는 출근길 속에서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가용을 운전하면서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잡한 전철을 타면서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밝은 태양이 비칠 때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내 인생에 어둠이 드리워 질 때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신학자 ‘에밀 브룬너’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인의 음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옛날에 빅토리아(Victrola) 유성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성기는 다른 말로 축음기라고도 하죠. 이 유성기에는 심사숙고해서 만들어진 마크가 붙어 있습니다. 이 마크가 빅토리아 유성기의 상표입니다. 이 상표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집에서 기르는 개가 나팔 통 곁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림입니다.
옛날 유성기는 녹음 상태도 나쁘고 기계 결함도 많아서, 음악과 함께 잡음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상표에 그려진 그림이 의미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이 제품은 많은 잡음 속에서 오직 주인의 음성만을 골라 듣는다는 뜻으로 개가 나팔 통 곁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리만을 골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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