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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끝인사

by 영구한도성 2022. 7. 28.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3 平康의 하나님이 親히 너희를 穩全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靈과 魂과 몸이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께서 降臨하실 때에 欠 없게 保全되기를 願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 兄弟들아 우리를 爲하여 祈禱하라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兄弟에게 問安하라
27 내가 主를 힘입어 너희를 命하노니 모든 兄弟에게 이 便紙를 읽어 주라
28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恩惠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본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 인사입니다. 그 끝 인사에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 으로 소개합니다.

 

‘평강의 하나님’ 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체가 평강이심을 뜻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평강이시기에, 평강이 그 분에게 있고, 그 분에게서 평강이 흘러나옵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이 평강은 세상이 알 수 없는 평강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응답은 미래의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평강은 지금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때가 되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지금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66장12절에서는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의 속성입니다. 그 평강은 강과 같고, 시내와 같으며, 어머니의 젖과 같습니다.

 

강은 유유하게 흐릅니다. 넘치는 시내는 생명력을 느끼게 합니다. 어머니의 젖을 빨며 그 품에 안긴 아기는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유유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사람은 넘치는 영적 생명력을 발휘합니다. 큰 바위가 앞을 가로 막고 있어도 넘치는 시냇물의 흐름을 막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큰 인생의 장애물이 막고 있어도 그것을 뛰어 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사람은 어머니의 젖을 빨며 그 품에 안긴 아기처럼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걱정, 근심이 있는 일이 발생해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려면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야곱의 사닥다리를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처음 몇 계단은 아직 까지 땅과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계단을 계속 밟아 올라가다 보면, 어느 듯 내가 디디고 있는 발은 하늘과 가깝습니다.

 

땅과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평강은 멀지만, 하늘과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평강은 가깝습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끝 인사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다 정리하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겨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평강이 없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녀에게 평강의 하나님께 거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 말씀합니다. ‘거룩’ 은 ‘구별되다.’ 는 뜻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삼는 것입니다.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 는 것은 거룩하게 하는 주권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 는 것은 부족함이 없는 거룩, 완전한 거룩을 말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착하게 살기를 원하고, 이런 저런 범죄의 유혹에 노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강의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자녀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평강의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말씀합니다.

 

영과 혼과 몸이라는 것은 전인격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하나님 앞에 흠 없이 깨끗한 자로 서기 위해서는 전인격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올바른 행실로써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흠이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그 존재자체로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그 존재자체로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사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생각이나 판단이나 감정은 자기를 속이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자기생각이나 판단이나 감정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의 모든 존재를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의 영을 받으시고, 회개하는 자의 삶을 받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면,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합니다. ‘미쁘시다.’ 는 말은 ‘신실하다’ 는 뜻으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니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이들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마무리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를 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쫓아가다가 방향을 바꿔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은혜를 쫓아가는 그 인생의 완성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이루십니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기 일행 곧,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이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은 몇 가지로 압축됩니다.

 

에베소 교인에게는 자신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엡6:19) 그리고 골로새 교인에게는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골4:3)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는 주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고 또 그들 일행이 악한 사람들로부터 구원받게 해 달라는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살후3:1,2)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울은 복음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도부탁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복음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는 것입니다. ‘입맞춤 한다.’ 는 것은 고대 동방이나 유대 사회에서 유행하던 인사법입니다. 이 인사법이 그리스도인 사회로 흘러들어와 성도들 사이에서도 통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안부를 물으면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당부합니다. ‘거룩한’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봉헌된, 순수한, 완전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봉헌된, 순수한, 완전한 입맞춤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순수하고 서로에 대해서 섬기는 자세로 입맞춤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의 입맞춤은 배반의 입맞춤입니다. 불순한 동기가 있는 입맞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는 서로에게 거룩한 입맞춤을 해야 합니다.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것은 2세기나 3세기 경 까지 통용되었으나 폐단이 많아 폐지된 곳이 많습니다. 지금은 인사말 또는 악수 등으로 바뀐 곳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도들 사이에서 인사말과 악수 속에 거룩한 인사말과 거룩한 악수를 통해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김의 마음을 가지고 인사말과 악수를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에 대해서 계산하며, 불순한 동기로 인사하며 악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이라는 영국의 시인은 ‘우리는 당신의 얼굴을 본적이 없지만 이 땅에 믿음을 심습니다.’ 는 말을 했습니다. 믿음을 심는 두 가지 양태(樣態)가 있다면,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심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관계성 속에서 심는 것이 있습니다. 그 관계성에는 성도와의 관계성이 포함됩니다.

 

성도와의 관계성에 있어 거룩한 인사말이 아니고, 거룩한 악수가 아니라면 그것은 믿음의 관계성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순결하게 대해야 하고,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바울이 본 서신 끝에서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은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라고 말하면서 아주 강한 어조로 부탁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바울의 본 서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서 올바른 신앙관을 형성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리와 교훈은 단순히 혼자만의 전유물로 남겨져서는 안 됩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고, 함께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자라고,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는 것을 보면, 시기할 것이 아니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격려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밭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경제용어로 ‘윈윈전략’ ‘윈윈게임’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밭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서는 다른 사람이 잘 못 되면서 내가 잘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말하면서, 본 서신을 끝맺습니다.

 

‘은혜’ 는 ‘은총’ 이라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기쁨을 수반하거나 기쁨을 유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때로 ‘은혜’ 라는 것은 ‘긍휼’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긍휼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 필요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사는 재미가 없다’ 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운명주의에 빠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 없다면 영적으로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재미는 없어도 ‘영적 기쁨’ 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이 있기에 비록 연약하여 범죄 하지만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긍휼을 아는 사람은 죄를 합리화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통곡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아는 사람이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긍휼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버림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버림받아야 마땅할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모든 편지의 끝에서 고별인사를 할 때, 독자를 향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기도합니다.

 

은혜는 나의 기도제목이 되면서도 성도들을 위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삶에 주님의 기쁨과 긍휼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성도들의 삶에 주님의 기쁨과 긍휼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42.195km를 뛰는 마라톤 선수에게 가장 힘든 시점은 체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임에도 결승점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체력이 거의 고갈되었어도 결승점이 눈에 보이면 없던 체력이 다시 생깁니다. 다시 전력질주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결승점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결승점은 이 세상 삶을 다 마치고 주님께로 갈 때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삶의 순간순간 고비를 맞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최종 결승점은 하나이지만, 성도들이 고비 고비 마다 통과해야 하는 작은 결승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결승점들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고비를 통과하면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안식처들이 있습니다. 그 안식처들은 우리를 새롭게 충전시킬 안식처들이고, 결국 최종 결승점에 다다르게 할 안식처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포기하지 말고 뛰어야 합니다. 뛰지 못한다면 걷기라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향해 인생의 한 발자국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