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하수구에 이물질이 끼여서 물이 내려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는 그 이물질을 걷어 내거나 하수구에 약품을 뿌려서 이물질을 녹이기도 합니다. 이물질이 없어지면 물이 잘 내려갑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기도의 물줄기가 막힌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답답합니다. 긴 시간을 기도해도 답답하고, 부르짖는 기도를 해도 답답합니다. 이런 경우는 기도에 이물질이 끼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회개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회개기도를 아무리 오래해도 여전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회개 기도를 해도 답답하다면 감사가 빠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회개기도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감에 있어 장벽을 제거하는 기도이지만, 감사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사실 회개기도와 감사기도는 별개의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세한 차이점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통회하는 심정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스겔 11장19절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라고 말씀합니다. (참조 – 겔36:26) 하나님께 나아갈 때 경직된 마음으로 나아가면 안 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부드러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부터 있어야 합니다. 감사가 그 마음 밭을 이룰 때 돌 같은 마음이 제거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바울은 2가지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주님께서 능하게 하셔서 일꾼 삼으셨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를 구원하시고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질 때는 내가 어디에서 구원받았는가를 망각할 때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구원을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나의 구원을 당연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준 것이 기억나지 않고 내가 하나님께 한 것만 기억납니다. 구원의 은혜와 지금까지 이끄시고 베푸신 은혜가 기억나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 봉사했던 것만 기억납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은혜의 관계성이 아니라 계약적 관계성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내게 이만큼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막힙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성은 계약적 관계가 아니라, 은혜의 관계성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러한 고백과 은혜에 대한 감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기도가 뚫립니다. 기도에 살이 붙기 시작하고, 기도의 내용이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기도의 물줄기가 굵어집니다.
사람과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대화 자체가 풍성하고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이 없다면 서로 필요한 말만 조금 하고, 사업적으로 대화를 끝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도 감사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 기도 내용이 풍성하지만 감사의 마음이 없다면 사업적인 내용으로 기도를 끝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됩니다.
14절을 보면,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주님의 은혜는 넘쳐 나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한 고백을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시편23편5절을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노래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넘쳐 나는 은혜를 발견해야 하고, 주님께서 내게 따라 주시는 잔이 넘쳐 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약한 몸 가운데서 삶의 실의를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병약한 몸 가운데서 주님의 붙드심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실패 속에서 좌절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인생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잔이 넘쳐 나고 있음을 발견하는 사람은 삶의 모든 상황 속에 감사가 생깁니다. 인간적으로는 시련이고 고통이지만, 감사가 충만한 사람은 그 시련의 시간 속에서,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바울이 긍휼을 입은 까닭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시점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시점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길이 참으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참으실 때는 참아 줄 만 해서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참아 주실 만한 죄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진홍같이 붉은 죄일 따름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참으시는 것은 단지 긍휼 때문이고, 그 긍휼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은 죄이고, 주님께서는 이런 나를 살리기 위해 일체 오래 참으셨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을 무엇이며,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이며, 앞으로 하실 일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오래 참으셔서 구원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넘쳐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사랑의 정점에서 영생을 완성시키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은혜의 주님이시며, 지금도 은혜의 주님이시며, 앞으로도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주님과 나와의 관계성에서 흔들릴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흔들릴 수 없는 사실 앞에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하신 주님에 대해서 감사하고, 현재 누리고 있는 은혜를 발견하여 감사하고, 앞으로의 삶이 주님의 은혜 속에 있음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감사가 있다면 기도가 바뀌고,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삶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 속에 바울의 기도제목이 나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절은 바울의 기도제목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온전한 감사는 감사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는 경우입니다.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감사는 그 감사를 받는 이를 즐겁게 하지만, 감사는 그 감사를 드리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우리 영혼이 즐겁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감사의 폭이 넓어지고, 감사의 깊이가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감사제목이 되지 않았던 것도 이제는 감사제목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 되었을 때 길이 참으셔서 구원하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지금도 연약하여 날마다 넘어지는 나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알게 됩니다. 지금 주님께서 믿음과 사랑 속에 넘쳐나는 은혜로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렇게 넘쳐나는 은혜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그 영혼이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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