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 없이는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 없는 곳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 없이는 만족할 수 없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아무리 내가 가진 것이 많고, 건강하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곳은 메마르고 황폐한 땅입니다.
모세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정점에 이른 것이 호렙산에서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은 극적인 만남입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 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고 합니다.
떨기나무는 키가 6m이하의 철쭉이나 가시나무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7장35절에서는 이 나무를 가시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애굽사람들로 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가시 채찍에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즉 고난의 불 속에 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떨기나무가 불속에서 타고 있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불꽃 가운데 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심을 말합니다.
세상은 가시나무요 하나의 거대한 불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가시나무 불꽃과 같은 세상에서 보호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그 환난의 불꽃에 나 혼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꽃 가운데 계셔서 나를 지켜 주십니다.
선택받은 백성의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버림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선택받은 백성은 그 삶에 불이 붙어도 그 백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세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삶도 가시나무 불꽃 속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삶이었습니다.
모세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하였습니다. 모세는 아주 위험한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태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이 중 남자 아이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살인자의 손에 넘겨줄 수도 없었지만 아이를 키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대를 엮어 만든 상자에 아이를 눕혀 하수가로 내려 보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이 아이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얼마나 했겠습니까? 갈대상자에 물이 들어가서 상자가 물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떠내려가다가 돌 뿌리에 걸려 상자가 뒤집어 질 수도 있습니다. 떠내려가서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곳까지 이르게 되면, 아이는 그 상자 안에서 굶어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갈대상자에 눕힌 아기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갈대상자가 하수가에서 뒤집히지 않도록 보호하셨고, 애굽의 공주를 만나게 해서 양육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장성하였을 때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애굽인 살인사건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디안 광야까지 도망을 했습니다. 미디안 광야까지의 거리는 대구에서 평양을 왕복하는 거리입니다. 엄청난 거리를 모세는 도망했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가기까지의 긴 세월, 모세는 사막에서 헐벗고 굶주리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막의 적막감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모세를 지키셨습니다.
로마서 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음을 말합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고 답변합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가시나무 불꽃 속에서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잘못되게 하지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고난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백성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일생은 모세 자신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출생 때 뜻하지 않게 하수가에 버려졌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미디안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으로 와서 보니 호렙이 하나님의 산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곳까지 양떼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역사적인 만남의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세의 삶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애굽에서 왕자로 있다가 살인죄로 도망하여 양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할까?”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왕자에서 양치기로 낮추어서라도 호렙산에서 만나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진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라고 부르시자,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아주 간결한 부름과 간결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모세의 전인생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부름이 있습니다.
갈대상자에 눕혀 하수가에 버려졌던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 사막의 적막감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모세를 지키신 하나님이 지금 “모세야!”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는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삶에 대한 이야기’ 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실 때는 “내가 너를 안다.” 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라고 부르셨을 때 그 음성을 듣고 모세는 아픈 과거를 모두 날려 버리게 되었습니다. “모세야!” 라고 부르시는 그 음성은 모세에게 밀려오는 환희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마치 썩은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듯이 그의 마음에는 새 생명이 피어났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가족의 핍박을 심하게 당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부친이 농약을 들고 나와 “함께 죽자!” 며 협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상처를 치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생명을 바쳐 나를 사랑한 것을 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가족 핍박 속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소망 없이 살아온 모세에게는 “모세야!” 라는 부르심 한 마디가 강렬한 소망이 생기게 만들었습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따뜻한 열기 속에 피어나는 소망이었습니다. 그 열기로 모세의 차가운 가슴은 녹아 내렸습니다. 왕자의 신분에서 양몰이꾼으로의 추락, 타향의 낯설음, 추위와 더위와의 고투, 40년 동안 양만 치던 세월 속에 한계에 달한 인내력 등 그를 괴롭혀 온 온갖 고통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따뜻했겠지만, 그 불길 보다 더욱 뜨거운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습니다.
모세와의 첫 대면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선 곳은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신 곳이기에 거룩한 땅입니다. 원래 죄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내 몸은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거룩한 땅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곳이 거룩한 땅입니다. 내가 눈을 떠서 잠을 자는 모든 시간들이 거룩한 땅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땅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가정도 거룩한 땅이고 직장도 거룩한 땅입니다. 여러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신을 벗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의 현장들 속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호렙산에서 모세가 자신의 신을 벗게 되는 것을 한 순간의 사건으로 받아 들 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신을 벗기기 위해 긴 세월 훈련하셨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오기까지 긴 세월 인생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숨 가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심령은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모세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나님의 성전과 같은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장10절에서는 광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라고 합니다. 광야는 외롭고 고독한 곳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찐하게 만나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는 언제나 고독합니다. 거기에서는 누구하고도 이야기 할 대상이 없습니다. 이야기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고 명상하도록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은 것을 보아도 얼마나 그가 고독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게르솜은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섬기는 자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깊은 사색과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격정에 휩싸이기 쉬운 성품이 다듬어 졌습니다. 또한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만한 영적 깊이를 광야생활에서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40년 동안 양치는 생활을 하면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3절에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모세는 실상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땅 위에 사는 사람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양 치는 일부터 시키셨습니다. 짐승의 생명을 돌보면서 나중에는 인간의 생명을 돌보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자의 경험이 없는 자는 예언자가 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목동이었던 다윗을 불러 이스라엘의 목자 곧 왕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은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를 불러 유대의 예언자가 되게 하셨던 것처럼,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양치는 생활을 40년 하게 하셨습니다.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수업에서, 어느 교수님이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습니다. 참다운 리더는 양쪽을 다 경험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가르치고 지시하는 자리에만 있었던 사람은 참다운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 밑에서 배우고 지시받는 입장에 처해 보았던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높은 자리에 가도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양쪽을 모두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받기만 해서도 안 되고, 주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 부부가 있는데, 어느 한 쪽이 주기만 하고, 어느 한 쪽은 받기만 하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병든 가정입니다. 훌륭한 리더는 사랑을 받는 법과 사랑을 주는 법을 모두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오랜 세월 속에 하나님 앞에서 받은 이러한 연단 때문에 자기의 신을 벗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나 더 성취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비록 애굽의 왕자자리를 잃어버렸지만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온유함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는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링컨은 “나이 사십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면 살아오면서 쌓인 인격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나이도 있습니다. 영적인 나이도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의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호적상의 나이는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나이와 영적인 나이는 세월이 지난다고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인격적인 나이와 영적인 나이는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 속에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실만한 인격과 영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 다듬으셨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영성도 하나님 안에서 잘 연단 받고 책임질 수 있는 얼굴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내가 신고 있는 어떤 신발이 나의 인격과 영성을 막고 있다면 그 신발을 하나님 앞에서 벗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