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베소서

에베소서 5장, 그리스도인의 삶

영구한도성 2022. 8. 5. 21:41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5 See then that ye walk circumspectly, not as fools, but as wise,
16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17 Wherefore be ye not unwise, but understanding what the will of the Lord is.
18 And be not drunk with wine, wherein is excess; but be filled with the Spirit;
19 Speaking to yourselves in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ing and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
20 Giving thanks always for all things unto God and the Father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21 Submitting yourselves one to another in the fear of God.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行할지를 仔細히 注意하여 智慧 없는 者 같이 하지 말고 오직 智慧 있는 者 같이 하여
16 歲月을 아끼라 때가 惡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者가 되지 말고 오직 主의 뜻이 무엇인가 理解하라
18 술 醉하지 말라 이는 放蕩한 것이니 오직 聖靈으로 充滿함을 받으라
19 詩와 讚頌과 神靈한 노래들로 서로 和答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主께 노래하며 讚頌하며
20 凡事에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恒常 아버지 하나님께 感謝하며
21 그리스도를 敬畏함으로 彼此 服從하라
 

에베소서 5장, 그리스도인의 삶

 

 

에베소서 2장2절과 3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구원이라는 것은 소속이 바뀌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고, 구원받은 후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르는 것이고, 구원받은 후에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영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이며 또 하나는 성령입니다. 악령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게 하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게 하는 영입니다. 반면 성령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영입니다.

 

중간지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악령의 지배도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도 받지 않는 상황은 없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므로 악령의 지배를 받든지 성령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종교가 없는 불신자라 해도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령의 지배가 없으면 악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착해 보입니다.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척 성실하고 도덕적입니다. 자그마한 잘못 앞에서도 마음에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이 없다 해도 악령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악령은 잔인하고 음란하고 파괴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전술 전략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그리스도와 관련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차원 높은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지고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라는 것도 차원 높은 도덕성과 종교성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사탄의 전술, 전략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불교 신자로 묶어 두면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삶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삶도 아니고, 종교적인 삶도 아니고 성령으로 사는 삶입니다. 본문은 성령으로 사는 삶, 곧 신령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첫째, 신령한 삶은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삶입니다.

 

나의 뜻을 따르고, 사람의 뜻을 따르고, 혈육의 뜻을 따르는 것은 신령한 삶이 아닙니다. 신령한 삶은 주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접고 주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 묻기 위해서는 우리의 귀가 주님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네 번째 문장,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하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사람의 뜻을 쫓아갑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상황 속에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기독교인 부모가 자녀를 결혼시킬 때 배우자의 믿음을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장 중요시 하는 신령한 부모들도 있지만, 믿음 보다는 경제적 정도를 살피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적 정도를 보고 결혼시킬 것 같으면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을 중요시 하는 부모들은 설사 경제적 정도가 양에 차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해 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습니다. 넉넉하게 살지 못하더라도 이 사람이라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감동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경우 불신자와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 상대 배우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결혼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신앙이 훌륭한 아내로 인해 불신자 남편이 구원받은 가정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신령한 삶이지만,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신령한 삶이 아닙니다.

 

15절을 보면,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라.’ 는 것은 지금 너희의 행함이 과연 주의 뜻에 합당한지, 그른 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주의 뜻에 합당한지를 다시 생각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나의 행함 속에 죄와 악행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행동에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살펴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지혜가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입니다.

 

16절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씀합니다. ‘때가 악하니라.’ 는 말씀은 ‘세대가 악하다’ 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우상숭배, 그리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들과 희롱하는 말들이 도시 에베소의 분위기였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은 이런 악한 세대에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에베소교인들은 그런 죄의 문화에 젖어들어 세월을 낭비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근신하고 깨어있어 그런 죄악 속에 세월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어떻습니까? 그 죄악이 에베소 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워올수록 더 심각해집니다. 포르노문화는 과거 일본과 미국, 그리고 유럽 몇 개 나라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포르노문화가 전세계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포르노는 어른들의 문화인 동시에 아이들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음란한 죄의 문화에 세월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 봉사도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음란한 죄의 문화에 세월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감각합니다. 그래도 본인은 ‘신자’ 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위안을 삼을 일이 아닙니다.

 

‘세월을 아끼라’ 는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보면 이것이 심각한 경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는 것은 ‘기회를 아끼라’ 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고, 구원의 기회가 있을 때 구원을 얻으라.’ 는 말씀입니다.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구원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은 따 놓은 당상(어떤 일이 틀림없이 진행될 것이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죄의 문화에 심각하게 젖어 있다면 속히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주의 뜻을 끊임없이 묻는 사람에게는 세상 죄악이 자리 잡을 틈이 없습니다.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삶은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합니다. 민감하기 때문에 어떤 죄가 발견되면 속히 그 자리에서 떠납니다.

 

둘째, 신령한 삶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합니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5장23절을 보면, 바울이 병약한 디모데를 위하여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적절한 필요에 따라 쓰는 것은 약이 됩니다. 문제는 약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쓰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마신다거나 몽롱한 그 상태를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것은 죄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즐겁게 하거나 몽롱한 그 상태를 즐기기 위해서만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필요성 때문에 마십니다.

 

속이 상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용기를 얻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여자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싶은 데, 술을 마시면 그 고백을 할 용기가 생깁니다. 현장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잔업을 하는 경우 맨 정신으로 못합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고기반찬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실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러면 그 막걸리 기운으로 저녁 늦게까지 일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필요성 때문에 마신다면 죄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죄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방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방탕한 것입니까? 용기가 생긴 것도 좋고, 저녁 늦게까지 일할 힘이 생긴 것도 좋은데, ‘이런 용기와 힘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용기와 힘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데서 생긴 것입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은 방탕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을 하는 것도 방탕한 것이고, 도박이나 자기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죄가 방탕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되면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면 그 이성이 성령 안에서 은혜롭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면 자기 한계를 초월합니다. 신학대학교수가 성령으로 충만케 하면 지식의 은사와 학생을 가르치는 지혜의 은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면 그가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붙습니다. 중보기도 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면 어떤 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는 말씀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성령세례’ 와 ‘성령충만’ 의 의미를 비교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성령세례’ 와 ‘성령충만’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그 의미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구분하지 않는 것이 맞는가’ ‘구분하는 것이 맞는가?’를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구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라는 것이 명령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고려한다면, 여기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구분을 하게 되면 성령세례는 구원적 의미가 되고, 성령충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명령이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성령충만하라’ 고 명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가 구원적 의미가 될 때 성령세례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이고, 성령충만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명령이 될 때 이것은 반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가 구원적 의미가 될 때는 성령세례가 수동적인 의미가 되고, 성령충만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명령이 될 때는 성령충만이 능동적인 의미가 됩니다.

 

요한복음 15장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태를 ‘목욕한 자’ 라고 표현하십니다. (요13:10) 성령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목욕한 자’ 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목욕한 자라도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을 씻는 일입니다. 발은 세상 속에서 늘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매일 씻어야 합니다. 이렇게 발을 씻는 것은 성령충만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됩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성령충만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성령충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이 성령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측면에서 이것 역시 수동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될 수 있도록 발을 씻는 것은 본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충만은 능동적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깨끗하게 하시는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데, 죄를 자백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깨끗해 진 심령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죄를 자백하는 일을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반복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에 참회의 기도를 매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반복해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회의 기도를 진심어린 마음으로 드리는 것에서 우리의 심령도 변화하고 성령충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사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방언을 한다든지, 통역을 한다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환상을 본다든가?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충만의 본질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의 본질은 성령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참회하는 심령에서 성령과의 동행이 시작되고, 깨끗해진 심령에서 충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하나님을 일컫는 단어 중에,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 가 있습니다. ‘곁에’ 라는 뜻을 가진 ‘파라’ 라는 단어와 ‘부른다’ 라는 뜻을 가진 ‘칼레오’ 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으로 오신 분을 ‘파라클레이토스’ 라고 합니다. ‘파라클레이토스’ 는 한 마디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성령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 신령한 삶입니다.

 

셋째, 신령한 삶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20절, 21절 말씀과 연결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게 됩니다.

 

제가 전임전도사를 있었던 교회 어느 권사님께서 얼마 전에 94세의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제가 그 분에 대해 인상 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천국방언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 권사님에게서 많이 듣던 두 마디의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안합니다.’ 이고 또 하나는 ‘감사합니다.’입니다. 그 분은 항상 이 말을 달고 사셨습니다. 소천하시던 직전에도 담임목사님에게 한 말은 ‘감사합니다.’ 였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 말 보다 아름다운 시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말보다 아름다운 찬송이 어디 있겠으며, 그 말보다 아름다운 노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빼어난 작문실력을 가진 사람의 시가 신령한 것이 아니고, 성악가의 찬송이 위대한 것이 아니며, 가사만 신령하다고 그것이 신령한 노래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 신령한 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어떠하며, 그리스도 앞에서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우리가 피차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신령해 지고, 우리의 교회가 신령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