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장, 물 위를 걸으심
마가복음 6장, 물 위를 걸으심
본문의 배경은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적 배경입니다. 해가 저문 어두컴컴한 밤이었습니다. 밤 사경이라고 나오는데 로마식 시간 계산법으로 새벽 3시-6시 사이입니다. 둘째는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는 물쌀 때문에 배가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는 매우 위험한 장소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혼자서 배로부터 떨어진 곳 곧 육지에 혼자 계셨습니다. 넷째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람이 거스리면서 위험한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항로가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항로가 항상 대낮처럼 밝으면 좋겠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밤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 인생은 위험한 물쌀로 둘러싸인 바다 한 가운데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데 예수님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동시에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예수님은 뭍에 계셨지만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와 가까이 계셨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우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먼 곳에 계시는 곳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네가 문을 열면...”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더욱 가까이 계심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리치기 전에 오히려 먼저 예수님이 우리의 대문을 노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바다 한 가운데서 위험한 물쌀로 둘러싸여 있어도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바다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다 어느 곳에 떨어지더라도 주님은 오십니다. 아니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바다...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51절과 52절은 제자들의 둔했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셔서 배에 오르셨을 때에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물 위를 걷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직 깜깜한 새벽이어서 더욱 놀랐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52절에서는 그들이 놀랐던 것은 깜깜한 새벽이어서도 아니고 사람이 물위를 걷는 놀라운 사건 때문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사하셨습니다. 그들이 놀랐던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떡을 떼셔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에 대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은 이상하거나 놀랄 일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잊어버리거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믿지 않을 때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과연 이 기도가 실현될까에 대한 의문은 바로 52절에 해당하는 둔한 우리의 마음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삶의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바다 한 가운데에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셔서 나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 가지 못해도 주님은 물 위를 걸으셔서 나에게 오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믿지 않는 자가 두려워한다고 하였습니다. 불신과 두려움은 서로 형제관계입니다. 우리는 바다 한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깜깜한 밤이나 거센 물쌀의 바다가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