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1장, 그리스도

영구한도성 2022. 8. 8. 22:56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9 I John, who also am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ribulation, and in the kingdom and patience of Jesus Christ, was in the isle that is called Patmos, for the word of God, and for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10 I was in the Spirit on the Lord’s day, and heard behind me a great voice, as of a trumpet,
11 Saying, I am Alpha and Omega, the first and the last: and, What thou seest, write in a book, and send it unto the seven churches which are in Asia; unto Ephesus, and unto Smyrna, and unto Pergamos, and unto Thyatira, and unto Sardis, and unto Philadelphia, and unto Laodicea.
12 And I turned to see the voice that spake with me. And being turned, I saw seven golden candlesticks;
13 And in the midst of the seven candlesticks one like unto the Son of man, clothed with a garment down to the foot, and girt about the paps with a golden girdle.
14 His head and his hairs were white like wool, as white as snow; and 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
15 And his feet like unto fine brass, as if they burned in a furnace; and his voice as the sound of many waters.
16 And he had in his right hand seven stars: and out of his mouth went a sharp twoedged sword: and his countenance was as the sun shineth in his strength.
17 And when I saw him, I fell at his feet as dead. And he laid his right hand upon me, saying unto me, Fear not; I am the first and the last:
18 I am he that liveth, and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more, Amen; and have the keys of hell and of death.
19 Write the things which thou hast seen, and the things which are, and the things which shall be hereafter;
20 The mystery of the seven stars which thou sawest in my right hand, and the seven golden candlesticks.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and the seven candlesticks which thou sawest are the seven churches.

 


9 나 요한은 너희 兄弟요 예수의 患難과 나라와 참음에 同參하는 者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證言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主의 날에 내가 聖靈에 感動되어 내 뒤에서 나는 喇叭 소리 같은 큰 音聲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等 일곱 敎會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音聲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金 촛臺를 보았는데
13 촛臺 사이에 人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金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羊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鍛鍊한 빛난 朱錫 같고 그의 音聲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左右에 날선 劍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者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者라 내가 前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世世토록 살아 있어 死亡과 陰府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只今 있는 일과 將次 될 일을 記錄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祕密과 또 일곱 金 촛臺라 일곱 별은 일곱 敎會의 使者요 일곱 촛臺는 일곱 敎會니라

 


요한계시록 1장, 그리스도

 

 

 

요한계시록은 다른 성경에 비해 두드러진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용의 대부분이 저자 요한이 본 환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주신 책으로서 다른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과 같은 영적권위를 가지고 있는 책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책이 이단들이 가장 많이 활용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환상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한이 본 환상은 일반적인 환상이 아닙니다. 그가 본 환상은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적이 많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인간의 언어, 곧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나라는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나라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방언에 대한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어떤 방언은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어떤 방언이 하나님나라의 언어라면 하나님나라는 그 방언을 통해 가장 적절히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비유도 아니고 방언도 아닌 환상을 통해 직접 목격하고 있습니다. 비유 속에 상징이 있듯이, 환상 속에도 상징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상징이 그렇듯이 한 가지 사물이나, 한 가지 단어 속에 하나의 상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사물이나 한 가지 단어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의 상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단들은 상징 해석에 있어서 단 하나의 의미만 부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의미도 그들만의 교리를 위해 왜곡합니다. 그러면서 본인들이 가장 명확한 해석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지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단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합적인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구약성경과 일치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하신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구약의 예언된 말씀과 일치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건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예언된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대한 확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단들이 지금까지는 해석되지 않았던 계시록의 말씀을 해석했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 계시록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이단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환상을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환상이 과연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환상이 성경에서 벗어나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환상이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성경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환상의 전반적인 줄기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음에 있어 이러한 큰 물줄기를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 깨닫는 것도 아니고, 어떤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주신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열려 있는 책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면, 주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봄에 있어 하나님 앞에 청결한 양심을 구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현장감 있게 그리스도의 사건이 내게 다가올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더욱 실제적으로 내게 다가올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명령’ 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명령은 1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 앞의 내용은 이 명령을 준행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러므로’ 뒤의 내용은 명령의 내용입니다. 그 명령의 내용이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는 것’ 입니다.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전하기에 앞서 자기소개부터 합니다. 9절을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기록할 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엡1:1] 혹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갈1:1]이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혹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요한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그러한 사도성 보다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이 편지를 받을 사람들과 공통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공통된 경험이라는 것은 곧 ‘너희 형제’ 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라는 사실입니다.

 

환난은 헬라어로 ‘들립시스 [thlipsis]’ 라고 부르고, 참음은 헬라어로 ‘휘포모네[hupomone]’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곧 천국은 ‘바실레이아 [basileia]’ 라고 부릅니다. 찰스[R.H찰스]라는 사람은 ‘휘포모네’ 곧 참음은 ‘들립시스’ 곧 환난을 ‘바실레이아’ 곧 천국으로 바꾸는 연금술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환난’ 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를 능히 건너게 하는 유일한 것이 ‘참음’ 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는 참음이야 말로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천국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저절로 천국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가정도 환난의 다리를 건너야 진정한 천국이 됩니다. 그 환난의 다리를 건너기 위해 부부가 참음으로 기다릴 때 그 가정은 천국이 됩니다.

 

IMF때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정도 많습니다. IMF를 받아들이는 가정들의 자세는 달랐습니다. 경제적 문제로 가족간에 불화가 생긴 가정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 어려움을 사랑과 신뢰로 극복한 가정도 있습니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사랑과 신뢰로 극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참음’ 곧 인내입니다. 며칠은 사랑과 신뢰를 가질 수 있습니다. 1달은 그런대로 서로 위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1년을 버티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2년이 되고, 3년이 되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부부간에 불신의 골이 깊어집니다. 전에는 짜증을 부리지 않았던 것도 짜증을 부리게 됩니다. 남 탓을 하게 됩니다. 사랑도 식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시험이 되는 것이 ‘참음’ 곧 ‘인내’ 입니다. 어려움이 2년이 되고 3년이 되어도 아니 10년이 되고 그 이상이 되어도 여전히 서로를 믿어주는 가정, 이것이 ‘참음’ 곧 휘포모네입니다.

 

고난 속에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가정, 이 가정은 진정으로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나라도 참는 자의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하고 몇 년은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뜨거운 신앙이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도 하고,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제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의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바로 이 때 필요한 것이 참음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참는 자에게 성큼 다가서게 됩니다.

 

마태복음 24장13절을 보면,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 메시지이지만, 우리는 이 메시지를 우리 삶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는 우리의 것입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받는 여러분처럼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끝까지 견디는 여러 형제들 중의 한 사람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요한은 고난 중에 있습니다. 지금 요한은 유배당하여 섬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 섬이 밧모라 하는 섬인데, 여기서 그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10절은 환상을 보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여기서 ‘주의 날’ 이라는 것은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심판의 날’ 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지지자가 별로 없는 편입니다. 둘째는 지금 우리가 주일로 지키는 그 날이라는 해석입니다. 안식일은 천지 창조 다음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을 기억하는 날이요, 주의 날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의 날은 곧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날’ 을 심판의 날로 해석하면, 지금 환상을 보는 지금이 심판의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환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준비시키기 위함인데, 환상을 보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의 날’ 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에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됩니다.

 

출애굽기 19장 16절을 보면,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나팔소리를 듣게 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나팔소리는 모세만 들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들었습니다. 그 때 당시의 정황은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팔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머물거나 이동할 때 불었습니다. 전쟁을 치룰 때도 나팔소리를 불렀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는 하늘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나팔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들려지는 나팔소리입니다. 그 나팔소리는 세상종말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 속에 요한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말하기를 그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려고 돌아다 보았다.” 는 뜻입니다. 이를 테면 누군가 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요한은 자신에게 말하는 음성의 주인을 보려고 몸을 돌이킨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 음성이 그 만큼 명확하고 선명함을 의미합니다.

 

돌이키는 순간 그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성막 안에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촛대가 있습니다. 촛대에는 양편에 세 개씩 총 여섯 개의 가지가 달려 있고, 불을 켤 일곱 개의 등이 있습니다. [출25:31-37] 그러므로 요한이 보았던 환상의 일부는 광야에 있던 성막의 일부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도 좌우 양편에 각기 다섯 개의 순금 촛대가 서 있었습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에도 촛대를 얹는 등잔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슥4:2]

 

그러므로 요한이 본 촛대는 철저히 구약 성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은 이미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 백성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을 통하여 이미 주신 계시를 배우고자 합니다. 이미 주신 계시가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이 이미 주신 계시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미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계시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요한은 촛대 사이에 인자와 같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니엘 7장13절을 보면,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인자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이제부터 받는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에게서 오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내신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13절을 보면, 그 모습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옷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데레스’ 인데, 이것은 발까지 닿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을 헬라어로 표기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출28:4,29:5,레16:4] 본문 말씀은 영화를 입으신 그리스도의 옷과 그 띠는 대제사장의 옷과 거의 같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부활의 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대제사장적 직책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란 그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이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계시면서 그 일을 맡아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죄 문제 해결 보다 급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가장 시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이러한 대제사장,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4절을 보면,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순결성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1장1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만이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바로 순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불꽃같고’ 말씀합니다. 다니엘 10장 6절을 보면, 다니엘도 횃불 같은 그리스도의 눈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3:34,10:23,11:11]

 

어떤 때는 노여움을 띈 눈빛으로 둘러보셨고,[막3:5] 어떤 때는 사랑이 넘치는 눈빛이었습니다. [막10:21] 그리고 어떤 때는 마음 속 깊이 상처 받으신 슬픈 눈빛이며, 애간장이 녹는 불쌍한 심령으로 바라보는 눈빛이었습니다. [눅22:61]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빛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눈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자기 눈빛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자기 눈빛 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눈빛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입술로 부르짖는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나님께 부르짖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살피고, 내 눈빛을 그리스도의 눈빛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말씀합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발은 빛난 놋과 같다.’ [단10:6] 고 묘사하였습니다. 주석이나 놋이 의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힘을 의미함과 동시에 부동의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지만 하나님은 부동의 확실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빛나는 빛은 빠름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일이나 죄를 벌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발의 빠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은 단일한 곡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단일한 곡조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무서운 음성이 될 때는 어떤 거대한 물결이나 파도와 같은 소리가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음성은 단일한 곡조가 아니기에 상처를 입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음성으로 들릴 때는 영혼을 적셔주는 여러 물소리가 됩니다. [왕상19:12]

 

16절을 보면, ‘그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권한과 권능을 발견합니다. 요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서 땅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의 오른 손을 펴서 그의 위에 얹으면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별을 잡고 계시는 그 손이 놀난 자녀의 머리와 어깨 위에 와서 쓰다듬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손은 하늘을 들고 있을 만큼 힘차시고, 또한 우리의 눈물을 다 씻어주실 만큼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물을 꿰뚫는 힘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 앞에는 우리의 포장된 모든 기만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위선이 드러나며, 우리의 모든 죄가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히4:12, 살후2:8]

 

그리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기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이 됩니다. [삿5:4] 변화산상에 있었던 제자들은 그 영광에 찬 변화를 결코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것은 변화산상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이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모습일 것입니다. [마17:2]

 

17절을 보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말씀합니다. 이것은 구약 성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사44:6, 48:12]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시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출생할 때 그리스도는 거기 계시고, 어떤 사람이 죽을 때도 그리스도는 거기 계십니다. 신자로서 삶의 길을 시작할 때도 그리스도는 거기 계시고, 그 길을 다 마칠 때도 그리스도는 거기 계십니다. 내가 삶에 지쳐 방황할 때도 그리스도는 거기 계시며,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영광을 볼 때도 그리스도는 거기 계십니다.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세상이 도래했을 때도 그리스도는 거기 계십니다.

 

18절을 보면,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열쇠로 사망과 음부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그 열쇠로 사망과 음부에 들어가게 하시어 나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20절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자’ 는 헬라어로 ‘앙겔로서’ 라고 합니다. ‘앙겔로서’ 는 원래 천사를 의미하는데, 경우에 따라 교회의 감독을 앙겔로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앙겔로서’ 는 교회의 감독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천사’ 로 해석하는 편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 자체가 이미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낸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별도로 교회의 감독을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사자’ 는 곧 하나님의 천사를 의미한다는 것을 더 뒷받침합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표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위대한 칭호 중에 하나가 ‘세상의 빛’ 이라는 사실입니다. [마5:14, 빌2:15]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밝히는 촛대라는 사실입니다. 빛 자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는 촛대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로서, 동시에 인자로서 오셨을 때는 죄사함과 부활의 완성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그 주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어 교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