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3장, 사데교회

영구한도성 2022. 8. 9. 09:31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사데 敎會의 使者에게 便紙하라 하나님의 일곱 靈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行爲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者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行爲의 穩全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悔改하라 萬一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者 몇 名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合當한 者인 緣故라
5 이기는 者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生命冊에서 決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天使들 앞에서 是認하리라
6 귀 있는 者는 聖靈이 敎會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And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of God,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hast a name that thou livest, and art dead.
2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3 Remember therefore how thou hast received and heard, and hold fast, and repent. If therefore thou shalt not watch, I will come on thee as a thief, and thou shalt not know what hour I will come upon thee.
4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ich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5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6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요한계시록 3장, 사데교회

 

 

 

1절을 보면, 사데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보내시는 이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라고 소개합니다.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키고, 일곱 별은 지상 교회를 보호하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령의 사역을 하시는 분이시며, 지상 교회를 보호하는 천사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숫자 7은 사역의 온전함을 말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온전한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는 충만한 것이며, 전지전능한 권능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숫자 7은 성령의 편재성(遍在性)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성령은 어디에나 계신다고 할 때 숫자 7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성령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하기에 흠이 없으신 분이시며, 그리스도는 완전하시기에 어디에나 계신 분이십니다.

 

믿는 자들이 영적인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온전하심을 믿지 못하고, 성령 임재의 충만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시며, 그는 어디에나 계신 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믿습니다. 그러나 삶을 통해서는 믿지 않습니다. 성령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의 삶 속에는 자기를 믿고 살아갑니다. 성령의 능력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능력을 믿습니다. 그는 전지전능하다고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 속에서는 그를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에나 계신 분이라고 기도하지만 삶의 구석구석에서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앞에서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영을 가지신 완전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자기의 모든 판단기준을 버릴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내 의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 중에 하나가 자기의 생각과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를 미루어 짐작하여 판단을 내린 후 확신을 가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판단이 틀렸고 항상 오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분은 주님 뿐이십니다. 일곱 영을 가지신 그리스도만이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설 때 회개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설 때 나의 잘못된 것, 틀린 것, 허물과 죄만 발견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를 말합니다. 이 사실은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말합니다. 그 분은 교회를 완전하게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교회가 자기들에게 속한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개척을 하여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도 목회자는 그 교회를 자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평신도가 건축역사에 막대한 헌금을 했다고 해도 그 교회를 자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교회를 자기 목적을 위해 다스릴 권한이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것이고, 주님만이 다스릴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정책 결정에 있어 나의 생각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과연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역의 모든 방법과 목적이 과연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모든 회중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며, 교회에 속한 자 모두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라고 소개하면서 사데 교회에 말씀을 보냅니다.

 

그 말씀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1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말씀하십니다.

 

사데교회에 대한 혹평(酷評)은 그 교회가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죄를 죽음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는 말씀은 사데교회의 죄 문제를 뜻합니다. 사데교회가 죄로 인해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이단의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데지역에는 아무런 거짓 교회의 출현이나 거짓 교사가 잠입한 증상도 없었습니다. 사데교회의 문제는 영적게으름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교회의 시험은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거짓 선지자 혹은 거짓 교사의 출현으로 인한 시험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교사는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해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역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와 거짓교사는 열심히 해 보고자 하는 교회에 역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테면 복음화 비율이 높은 경기도 지역이 이단 신천지가 기성을 부립니다. 반면 복음화 비율이 낮은 대구 지역은 복음 전도도 잘 되지 않지만 신천지 전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천지 전도도 잘 되지 않는 땅이 대구라고 해서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이단이 기성을 덜 부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땅이라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사단은 이단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영적 게으름을 통해서도 역사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이단의 문제로 몸살을 앓은 교회가 있는가 하면, 사데 교회는 이단의 문제는 없었지만 영적 게으름이 교회를 좀 먹고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게을렀고 영적으로 나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혹평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2장11절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말씀합니다.

 

직장생활에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비록 평사원이지만 사장과 같은 마인드(mind)를 가지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공합니다. 이 회사가 내 회사다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열심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일찍 일어납니다. 시키지 않은 일도 합니다. ‘회사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다.’ 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그 회사에서 오너(owner)가 되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성공합니다. 그것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자세가 생각과 몸에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평사원과 같은 마인드로 직장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눈치를 보며 일을 합니다. 시키는 일만 합니다. 자기 개발이나 발전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마지못해 일할 뿐입니다. 이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게으름이 생각과 몸에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늬만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9절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의 영적정체성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영적정체성이 있는 사람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지만, 이러한 영적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대충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데교회의 문제는 열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책망하십니다. 특히 사데 교회는 이단도 없었고, 외부로부터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공격도 없었고, 박해도 없었으며, 유대인의 비방이나 중상모략도 받지 않았습니다.

 

실상인즉 사데 교회는 문제가 너무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외부적인 충격이나 내부적인 갈등이 너무 없다 보니 영적 긴장이 모두 풀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되어 가고 있어도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모팻이라는 사람은 사데 교회의 문제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종교의 형태는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능력으로서의 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5절을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씀합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단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이단도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이단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 전통과 기독교 문화만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책망하시고, 이런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되고 경건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되고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기도 잘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되고 기도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라 심령으로 통회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는 항상 공격을 받게 마련입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는 사단이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자리에 사단의 시험도 있습니다. 깊이 있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차원 높은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비를 잘 넘기면 사단의 시험 속에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사단의 시험이 없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도 사단의 시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기도, 이미 죽은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을 상실하면 사단이 공격할 가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사데 교회 현재 상태는 사단이 공격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생명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사단이 시기하는 교회입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가 사단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반대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가 세상에 순응하면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 죽은 교회가 됩니다. 어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편에 서고자 할 때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됩니다.

 

주되심교회가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생명력 있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절을 보면,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으니” 말씀합니다. ‘일깨어’ 라는 것은 영적으로 각성하라는 뜻입니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그 조금 남은 영적 양심을 근거로 하여 강하고 성숙한 믿음을 다시 지니라.’ 는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으니.’ 라는 말씀은 ‘온전한 믿음의 행위가 결여되어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했다.’ 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 말씀을 받는 교회와 이 말씀을 받는 성도는 아직 기회가 있고 소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완전히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3절을 다함께 한 목소리를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회개에 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회개는 우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사건이나 문제가 있을 때 습관적으로 어떤 말을 합니까? “그 사람 회개해야 할 사람이야?”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 지금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으면 큰 일 당할 거야?”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녕 자신이 회개해야 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할 때 닭똥 같은 눈물 한 번 흘린 것으로 충분하고, 그 다음부터 회개라는 것은 내 몫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몫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회개는 다른 사람 몫이 아니라 내 몫입니다.

 

회개는 모든 이들의 신앙의 출발이자 마지막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함은 내가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며,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함은 주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심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회개에서 시작되어 회개에서 완성됩니다. 성화라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더욱 깊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며, 성화라는 것은 이런 나를 주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아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하게 될 때도 회개가 동반되는 것이며, 이 세상 삶을 다 살고 주님 앞에 갈 때도 우리의 신앙고백은 회개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은 내가 잘한 것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여러 죄들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잘한 것이 기억이 나는지? 아니면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못한 것이 기억이 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못한 것이 기억나는 사람은 더욱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겠지만, 내가 잘한 것이 기억나는 사람은 그다지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내가 못한 것이 기억나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지만, 내가 잘한 것이 기억나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은혜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남은 작은 신앙 양심을 다시 잡고 하나님께 다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남은 작은 신앙 양심을 붙들고 다시 하나님께 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세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절은 아직 사데 교회에 남아 있는 영적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말씀합니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은 믿음의 정절을 잃지 않은 성결한 소수의 신자들을 말합니다. 다른 소아시아 교회들은 소수의 신자들이 타락한 반면, 사데 교회는 소수의 신자들만이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단의 세력이 있었고, 핍박이 있었던 교회들은 다수의 신자들이 강건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단의 세력도 없었고 핍박도 없었던 사데 교회는 소수의 신자 몇 명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교회를 강건케 하고, 구원이 무엇인가를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없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시험이 있을 때 믿음으로 승리해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4절을 보면,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5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말씀합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있는 사데교회의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은 끝까지 이겨 나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위기 가운데 있는 사데교회의 다수의 사람들은 회개하고 다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합니까?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있는 소수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회개를 해야 하는 다수의 사람입니까? 어느 쪽이든 오늘 우리는 새롭게 이 자리에 서서 세상에서 승리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의 생명책을 통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0장20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일로 기뻐할 일이 있습니다. 월급이 올라가도 기쁘고, 사업이 잘 되어도 기쁩니다. 자녀 문제가 술술 잘 풀려도 기쁩니다. 풀리지 않던 가정문제가 해결되어도 기쁩니다. 목회자의 기쁨은 교회가 평안하고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엇보다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6절에 귀 있는 자는 들을 귀 있는 자를 말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귀가 할례 받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들을 귀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사데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되심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가정이 살아나고, 내가 영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