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창세기

창세기 4장, 더욱 난폭한 세상

영구한도성 2022. 7. 17. 21:33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者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呼訴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詛呪를 받으리니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傷處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傷함으로 말미암아 少年을 죽였도다
 

 

 

본문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사건에 이어 라멕이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입니다. 가인이 최초의 살인자라면 라멕은 최초의 연쇄살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3절을 보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죽였습니다. 라멕이 사람을 죽인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상처로 인해 사람을 죽였고, 상함으로 인해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라멕이 입은 상처와 상함이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두 사람이 싸우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 우발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라멕이 어떤 사람에게서 듣기 싫은 말을 들어서 죽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라멕은 본인이 상처를 입었다는 이유로, 상함을 당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보복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 중에 한 사람은 소년입니다.

 

요즘에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소한 시비가 이유가 되어 사람을 죽입니다. 심지어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에 대해 지나가는 사람이 듣기 싫은 말을 했다고 그것이 시비가 되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세월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악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겐 난폭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난폭성이 생깁니다. 아동기 때 보다는 청소년기 때 청소년기 때 보다는 성인기 때 난폭성이 더 심해집니다.

 

이러한 난폭성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상대방이 자기 마음을 좀 상하게 했다고 뒤통수치는 행동을 하고, 상대방의 말이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먹다짐을 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난폭성 때문입니다. 설사 겉으로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지만 속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상대방을 저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살인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속에 있는 폭력의 문제 전체와 관련 있습니다. 폭력이라는 것은 완력으로 공격하고 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여러 수단을 통해 사람의 인격을 말살시키고 그것을 경멸하는 것까지 다 폭력입니다. 아마 우리는 인간 세상에 폭력을 행하고 또 폭력을 당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여러 조직사회에서, 다양한 대인관계 속에서 폭력은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폭력을 휘두르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 받아야 할 죄 중에 하나가 이 폭력의 죄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폭력도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허용하지 않음을 보여 주십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말씀 하시고, 그 다음에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였을 때 아벨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 피를 땅이 받았으므로 땅이 저주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그 땅에서 네가 소출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가인이 죽인 아벨의 피를 땅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땅이 그 폭력의 대가를 폭력을 행한 자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폭군의 말로가 항상 비참합니까? 그것은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큰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에게 성전을 지어서 바치려고 했습니다. 다윗만큼 믿음좋은 사람이 잘 없고, 다윗만큼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한 사람도 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서 바치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너는 안 된다. 너는 네 손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너는 안 된다.” 말씀 하셨습니다. 다윗은 폭군이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어쩔 수 없는 전쟁들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손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손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전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가인이 징벌을 받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징벌을 받게 되었는데 가인이 벌벌 떨었습니다. “이제 제가 가면 모든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고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너를 죽이는 자는 칠배나 더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인이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신 것은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통해서 행사되는 폭력은 완력을 사용하는 것 보다 더 잔인한 경우가 있습니다. 칼로서 남을 죽이는 것은 말로서 남을 죽이는 것보다 덜 효과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칼이나 총은 사정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모여서 다른 사람 욕을 하고 시기하고 모함 했을 때, 그 말은 한 사람의 인격을 그 사람도 모르는 사이에 죽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혀에 재갈을 물려라”고 말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 합니다. 온유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온유함의 기초에는 행동으로 하는 폭력성, 마음과 말로써 하는 폭력성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또 하나의 폭력은 자신에 대한 폭력입니다. 자책감이 그것입니다. 자책감은 자신에 대한 폭력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매질을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살아서는 안 돼. 빨리 죽어야 돼 말하면서 학대를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에 대한 폭력의 희생자입니다. 이러한 자책감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폭력입니다.

 

마가복음 9장50절을 보면,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고 말씀 합니다. 소금은 원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사용했습니다. [레2:13, 겔43:24] 그런데 예수님은 소금을 “평화” 를 의미하는 긍정적인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평화라는 것은 서로간의 희생이 있을 때 유지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희생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헌신함으로 화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나 사이에 소금을 두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소금을 두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모든 불평과 원망들을 버려야 합니다. 비록 세상은 난폭하지만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난폭성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난폭해져 가지만 우리는 세월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유함을 덧입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