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3장, 빌라델비아교회

영구한도성 2022. 8. 9. 09:38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7 And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Philadelphia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is holy, he that is true, he that hath the key of David, he that openeth, and no man shutteth; and shutteth, and no man openeth;
8 I know thy works: behold, I have set before thee an open door, and no man can shut it: for thou hast a little strength, and hast kept my word, and hast not denied my name.
9 Behold, I will make them of the synagogue of Satan, which say they are Jews, and are not, but do lie; behold, I will make them to come and worship before thy feet, and to know that I have loved thee.
10 Because thou hast kept the word of my patience, I also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which shall come upon all the world, to try them that dwell upon the earth.
11 Behold, I come quickly: hold that fast which thou hast, that no man take thy crown.
12 Him that overcometh will I make a pillar in the temple of my God, and he shall go no more out: and I will write upon him the name of my God, and the name of the city of my God, which is new Jerusalem, which cometh down out of heaven from my God: and I will write upon him my new name.
13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7 빌라델비아 敎會의 使者에게 便紙하라 거룩하고 眞實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門을 두었으되 能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行爲를 아노니 네가 작은 能力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背叛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會黨 곧 自稱 유대人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者들 中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忍耐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試驗의 때를 免하게 하리니 이는 將次 온 世上에 臨하여 땅에 居하는 者들을 試驗할 때라
11 내가 速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冕旒冠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者는 내 하나님 聖殿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決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城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記錄하리라
13 귀 있는 者는 聖靈이 敎會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장, 빌라델비아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주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주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래 ‘거룩’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자신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칭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되실 수 있고,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거룩’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6장 3절을 보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스랍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스랍’ 의 원뜻은 ‘불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절대 성결한 영적존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타는 듯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좌하고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부르고 있었고,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이사야가 들은 것입니다.

 

‘거룩’ 이라는 단어에는 ‘다른’ 이라는 의미와 ‘빼어낸’ 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즉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된’ 이란 뜻을 담고 있는 것이 ‘거룩’ 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거룩’ 은 그는 창조주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다른 피조물들로부터 구별되십니다.

 

‘거룩’ 이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창조주의 영향력 속에 있으며, 창조주가 계시기에 존재하는 것이 피조물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창조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없다면 우리는 오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내일 아침 눈을 뜬다면 하나님께서 내일 아침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겸손해야만 합니다.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요리문답 첫 번째 질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입니다. [고전 10:31, 롬 11:36, 시 73:24-26, 요 17:22]

 

우리의 목적이 이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드신 분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3장 15절을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말씀합니다.

 

구약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칭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창조주가 있으므로 피조물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계시므로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생명유기체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비로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내가 교회의 일원인 것을 확인합니다. 교회봉사도 중요하고, 교회직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을 진실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진실’ 이란 뜻의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레테스란 낱말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진술은 거짓 진술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진실입니다. 이를테면 법정에서 진실한 진술을 할 수 있고, 거짓 진술을 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진실한 진술을 한다면 이것을 알레테스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을 알레테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실’ 이라는 뜻으로 ‘알레티노스’ 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몽롱하고 실재하지 않는 것의 반대에 해당하는 진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조품의 반대인 진짜를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모조품 다이아몬드가 있고, 진짜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겉으로 비슷하게 보여도 모조품과 진짜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본질적인 차이는 모조품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는 사실이고, 진짜는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입니다. 진짜 다이아몬드를 말할 때 ‘알레티노스’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는 ‘알레티노스’입니다. 본문에서 뜻하는 진실은 모조품이 아닌 진짜를 뜻할 때 사용되는 ‘알레티노스’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알레티노스’ 이신 ‘진실’ 이십니다. 주님 안에 실재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진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진리의 희미한 그림자나 영상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를 만나는 것입니다. 진리 그 자체이시기에, 요한복음 14장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 자체이시고, 예수님께서 진리자체이시며, 예수님께서 생명자체가 되시니 예수님은 ‘알레티노스’ 가 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은 실재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진리의 희미한 그림자나 허구나 망상을 쫓는 것입니다. 신앙은 실재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관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삶을 만나는 것입니다. 생의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삶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자살을 할 때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단지 삶이 어렵기 때문이겠습니까? 인생의 짐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일이 도래했기 때문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살기엔 자신이 너무나 능력이 없고 마음이 여리기 때문이겠습니까? 물론 맞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삶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삶을 만난 사람은 어찌해서든지 살아갑니다. 그 사람에게서 있어 그리스도는 ‘알레티노스’ 곧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손가락에 수억원 대의 진짜 다이아몬드를 끼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이아몬드만 바라봐도 가슴이 뿌듯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내 영혼이 즐거울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만이 ‘알레티노스’ 곧 ‘진짜’ 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영생의 삶이 있습니다. 영생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삶입니다. 주님을 떠난 이 세상의 삶은 진짜 삶이 아닙니다. 모조품에 불과한 삶입니다. 모조품에 불과한 삶은 언제까지나 방황하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주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열쇠란 권위의 상징입니다. 히스기야 왕에게는 엘리야김이라고 하는 충실한 청지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집 안에서 가장 높았고 그만이 왕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 충성된 엘리아김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이사야 22장 22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22장 22절에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만이 다윗의 새 성읍인 새 예루살렘으로 우리를 들여보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열쇠를 가지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시며, 진실하시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천국 열쇠를 가진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향해 천국 문을 열어 놓으셨음 말합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는 말씀은 어떤 대적자도 천국 문으로 들어오려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훼방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유대인들의 훼방이 많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칭찬하시기를,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 천국문은 언제나 열린 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은 천국문은 닫힌 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천국 열쇠를 가지신 주인이시기에 천국문에 합당한 자만 들어오게 하십니다. 합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합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말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말을 지키는 것이며, 무엇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겉으로 보는 사실만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배반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하루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잘난 모습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했던 못난 모습입니까? 조심스러운 얘기이겠지만, 못난 모습이 우리의 현 주소가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12장3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삶을 성령과 결부하여 생각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7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떠나가심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떠나가시지 않는다면 보혜사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회개의 음성으로 찾아오실 때, 순종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명을 깨닫게 하실 때 순종하여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연약하여 말로 그리스도를 거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네 무리가 비록 적고 작고 약할지라도

네 대장의 힘을 입으면 강하리

모든 땅을 정복하러 갈지어다

끝내는 모두가 주님의 것이 되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신실한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작지 않고, 연약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신실한 이들에게 천국 문은 항상 열린 문입니다.

 

9절에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 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만을 자랑하는 육적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의 복음을 영접한 성도들만이 참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진짜 유대인이 아니며, 자칭 유대인이며, 교회를 박해하는 사탄의 집단에 속합니다.

 

모태신앙은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 교회학교에 부모님 손을 잡고 나오게 되고, 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라온 이들은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신앙이 잘 자란 채,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그의 자녀들도 믿음의 자녀가 되면 자자손손 얼마나 복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결국 믿음은 개별적인 것이고, 한 사람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신앙으로 천국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나의 믿음으로 천국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문은 오직 믿음과 관련있는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들은 믿음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하고 있었지만 천국문과는 관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을 보면,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며 교인들을 박해하는 그들이 성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10절은 유대인의 박해를 견디어 내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에 대한 칭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해야 할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는 일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참고 기다리는 시간은 슬픕니다. 인내하는 시간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슬프고 외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 슬픔과 외로움이 끝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그 슬픔과 외로움의 시간에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그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십니다. 사실 슬프고 외로운 시간도 주님 안에서는 고귀한 것입니다. 슬프고 외롭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있었던 슬펐던 시간, 지금 아직 끝나지 않은 외로움의 시간이 있기에 더욱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10절 하반절의 시험의 때는 종말에 있을 대환난의 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상적으로 성도들이 세상에서 수시로 당하는 시련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라는 앞의 말씀과 결부지어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시험을 받을 때 그 시험을 면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시험으로 말미암아 눈물 흘릴 기회가 많다면, 그만큼 그 시험을 면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기회도 많은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말씀합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라는 말씀은 주님께서는 빠른 시간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우리는 시험의 때에 속히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시험 때가 그다지 길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까지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둥’ 은 건축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지킨 성도는 하나님나라에서 높고 존귀한 신분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은 천국 바깥으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천국 문 안에 한 번 들어간 자는 결단코 다시 나갈 수 없습니다. 동시에 천국 문 밖에 있는 자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영원을 좌우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를 만난 사람은 천국 문에 들어가고 다시 나오지 않지만, 그를 만나지 않은 사람은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갈 기회를 영원토록 상실합니다.

 

12절 하반절에 ‘이름을 기록한다’ 함은 자신의 소유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신앙 가운데 승리의 삶을 산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하늘의 축복을 영원토록 소유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