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창세기

창세기 13장, 선택

영구한도성 2022. 7. 17. 21:43
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所有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家畜과 銀과 金이 豊富하였더라
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前에 帳幕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祭壇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一行 롯도 羊과 소와 帳幕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同居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所有가 많아서 同居할 수 없었음이니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家畜의 牧者와 롯의 家畜의 牧者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居住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親族이라 나나 너나 내 牧者나 네 牧者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左하면 나는 右하고 네가 右하면 나는 左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地域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滅하시기 前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地域을 擇하고 東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居住하였고 롯은 그 地域의 都市들에 머무르며 그 帳幕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惡하며 큰 罪人이었더라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재산이 많은 족장이었습니다. 부족들은 대부분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아브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였습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을 기점으로 창세기 역사의 새 흐름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이교도의 세계에서 부르셨으며, 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놀라운 약속들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교도 세계의 족장 아브람을 부르심으로 새 역사를 시작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멸망 받을 이 세상에서 나를 불러 새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향하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익숙한 세상의 삶을 떠나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심으로 아브람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선 아브람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교도의 세계라고 부르지만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친숙한 땅입니다. 고향이며 친척들이 있는 땅이며, 아버지의 집입니다. 오랫동안 생활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땅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지의 세계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하여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에 대한 약속을 믿고 따라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버리며 따르는 것입니다. 정들었던 것, 익숙한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떠나라.’ 는 명령 속에는, 떠날 때 아브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곳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갈대아 우르의 족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떠남으로 하나님의 자녀요,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의 제단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 부터 떠남’ 에 대한 고백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조금만 나가면 노래방이 있고, 조금만 나가면 나이트클럽이 있습니다. 조금만 나가면 놀이공원이 있고, 영화관이 있습니다. 나가지 않더라도 내 손 안의 스마트폰이나 집에서 PC를 통해 게임을 할 수 있고, 재미있는 동영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안경 하나를 끼면 가상현실까지 체험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재미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재미를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설사 교회에서 재미있는 것을 개발한다고 해도 세상의 것 보다 재미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재미없는 교회, 재미없는 예배, 재미없는 설교를 들으면서 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입니까? 세상의 것으로 부터 떠남에 대한 나의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 상당히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은 혈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쳐진 생활의 터전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위치는 족장으로서 책임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 먹고 사는 식솔(食率)들이 많습니다. 이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23절을 보면,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실제 그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는 사실 속에 있습니다. 아브람의 구원은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롬4:11)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익숙한 이 땅에 기거하면서 멸망의 자손이 될 것인가? 그 땅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충분히 고민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만 하셨지 목적지를 명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목적지는 떠난 후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목적지를 모르지만 오직 하나님 말씀만 믿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천국이라는 목적지가 있지만,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은 마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매일 현실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면서 살아갑니다. 현실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습니까? 천국을 소망하면서 극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뒤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얻은 것 보다는 잃은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천국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 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당장 천국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고 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이 땅이 말씀하신 땅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12장 5절과 6절을 보면, 아브람은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12장 7절을 보면,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이곳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인 것을 알고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은 애굽에 거류하려고 내려갑니다.

 

여기서 부터 아브람의 실수가 시작됩니다. 남방으로 내려가던 아브람 일행은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미색을 보고 그녀를 취하려는 바로에게 아브람은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세상과 타협하는 나약함을 보였습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립니다. 바로는 사래가 아브람의 누이가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인 것을 알게 되어 아브람의 모든 소유를 포함해서 아브람의 일행을 애굽에서 내 보냅니다.

 

아브람은 두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이유로 애굽으로 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 삶의 땅은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땅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이 땅이 비록 기근이 들어 배고픈 땅이라고 해도 그 땅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땅이라면 그 땅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변에 우리 눈을 유혹하는 땅이 있어도 그 땅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사람이 무서워서 세상 사람과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담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애굽에 갔던 것과 애굽에서의 자기 실수가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 성숙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본문 말씀, 창세기 13장, 아브람과 조카 롯이 서로 떠나는 사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성숙한 신앙인격과 믿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떠나게 됩니다. (창12:1,5) 그런데 그 여정 속에서 아브람은 조카 롯과 헤어져야 할 일이 발생합니다. 헤어지게 되는 이유는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3장 7절 말씀을 보면, 그 갈등이 표면화 되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권다툼이 생겼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은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소유에 대한 문제 때문에 분쟁이 발생합니다. 아예 상속해 줄 재산이 없다면 분쟁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속되는 재산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형제지간의 우애도 깨어집니다.

 

잘 아시다시피 지금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형제간의 싸움이 아닙니까? 그런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부모님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둘러싸고도 얼마나 분쟁이 많습니까? 멍청하게 있다가 자기가 가질 몫을 챙기지 못하면 바보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는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롯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 가운데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에 있는 온 땅에 대한 선택권은 아브람에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족장으로서 롯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롯은 자기 조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족장이자 어른인 아브람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선택권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조카 롯은 자기가 받은 선택권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멸망 받을 소돔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마지막엔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가 가진 권리를 오히려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아브람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롯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가 주장이 분명한 롯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는 아브람처럼 양보만 하면 사람들이 얕잡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똑똑해 보이는 롯이 축복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선택권을 양보한 아브람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람은 비록 양보했지만 더욱 강성해 졌고, 롯은 자기 욕심대로 했지만 나중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 인생 방향이 분명했기 때문에,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카 롯에게 땅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화려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비록 기근 때문에 애굽에 갔던 적이 있고, 그 곳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겁 많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제 그는 오직 약속의 땅만을 바라보는 성숙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의 선택과 롯의 선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아브람은 선택권을 롯에게 맡긴 것이고, 롯은 아브람으로 부터 선택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이렇습니다. 아브람은 선택을 하나님께 맡기고, 롯은 자기 육신의 소욕대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삶이란 것이 복잡다단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 선택은 단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느냐?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6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합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상황 속에서 아브람은 어떤 결단을 합니까?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말합니다.

 

우선 아브람은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화평을 선택하였습니다. 13장 8절을 보면, 아브람은,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차라리 손해를 볼지언정 다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화평을 위해 손해 보는 쪽을 택한 아브람이 소돔의 멸망으로 부터 구원을 받게 되고, 더욱 큰 부자가 되지만, 양보하지 않고 좋아 보이는 땅을 택한 롯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마지못해 땅의 선택권을 롯에게 준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선택권을 롯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선택이 신앙의 즐거움을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목표를 달성하는 성취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행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는가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삶은 순간순간 선택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의 선택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할 때, 우리 마음도 하나님 안에서 기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2절을 보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장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억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선택권을 롯에게 주는 것에 대해 마음에 걸림이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실까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당시 요단 지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음성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음성은 강하고 화려하고 유혹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합니다. 세상의 음성을 듣는 것은 연습이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들리는 것이 세상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귀를 기울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음성을 걸러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12절 하반절을 보면,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말씀합니다.

 

롯은 처음부터 소돔 땅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물렀습니다. 소돔의 주변 도시입니다. 그런데 장막에 있다 보니, 소돔 땅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소돔으로 서서히 자리이동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소돔의 중심부까지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죄악의 땅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조금씩 좋아 보이면서 서서히 자리이동을 하게 되는데, 나도 모르는 순간에 그중심부에 있게 됩니다.

 

세상의 음성이 이렇습니다. 세상의 음성은 처음에는 소돔의 변두리에 있는 우리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오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가까이 가고 더 이상은 말자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음성은 이왕이면 한 발 더 오라고 합니다. 한 발 더 나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발 더 나갑니다. 세상의 음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때다 싶어, 어느 순간에 우리를 소돔의 중심부에 발을 딛게 합니다. 소돔의 중심부에 발을 딛게 되면 죄가 죄로 보이지 않습니다.

 

소돔은 동성연애가 난무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돔은 그곳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롯이 이러한 소돔의 중심부까지 가게 된 것은 조금씩 자리이동을 하는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된 것입니다. 사람의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불행할 줄 알면서 그 쪽으로 계속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소돔을 향한 롯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낙원 속에서 살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지옥의 수면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의 화려함에 도취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옥의 수면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소돔으로 가지 않게 된 것은 아브람의 안목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아브람도 소돔 땅이 좋아보였고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그 땅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따라가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아브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조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말했습니다. 아브람의 이 말 속에는 자기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결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실수를 했듯이, 우리도 삶 속에서 실수를 하고 죄와 허물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수와 죄와 허물이 오히려 아브람처럼 전화위복이 되어, 더욱 더 이 세상이 아니라 약속의 땅, 하나님나라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