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갈릴리 바다
누가복음 8장, 갈릴리 바다
본문의 호수는 갈릴리 바다입니다. 해면(海面)보다 180미터 이상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바다입니다. 고원지대로 둘러싸여 있어서 호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넓이와 깊이 때문에 바다로 부르기도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이름이 헤르몬 산입니다.
이 지역은 헤르몬 산에서 호수에 이르기 까지 깊은 협곡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협곡들은 헤르몬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찬바람을 갈릴리 바다까지 흡입력 있게 강하게 끌어들이는 깔대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일어나곤 합니다.
23절의 광풍이라는 것은 ‘지진’ 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광풍이라는 것은 지진과 같은 위세로 몰아치는 폭풍우를 의미합니다.
행선할 때 제자들은 이러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광풍이 호수로 내리쳤고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때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배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예수님은 곤히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을 곧 바로 깨우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바다에 익숙한 제자들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위기를 돌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을 퍼 내고, 더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배에 물이 가득 찰 때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그들은 누워 계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절한 간청이 결국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게 되었고, 잠에서 깨신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심으로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주님이셨습니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온갖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병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도 멀쩡하게 하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셨습니다. 특히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은 유대사회에서 큰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이적이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자연입니다. 그 대상이 바람과 물결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곧 바로 깨우지는 않았던 이유도 그 대상이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시편65편 5절-7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이 노래가 의미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을 진정시키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노래입니다. 즉 자연의 창조와 다스림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노래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세상만국의 폭동사태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으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명령을 받는다는 노래입니다. 자연과 세상만국의 여러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노래입니다.
결국 이 노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 발생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이든 세상만국의 일이든 모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비롯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한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우리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지금까지 어떤 삶의 여정을 밟아 왔습니다.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우리의 삶이 진행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므로 모든 시간과 장소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낙심과 절망으로 웅크리고 있는 구석진 방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큰 수술을 앞두고 수술 후,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그 불안한 심령 속에서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말을 던질 때 그 불신과 원망의 혀 속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감으로 잠 못 이루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그 시간에 함께 계십니다.
시편 139편 7절과 8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즉 내가 죽어 내 영혼이 위로 올라가는데, 거기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이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죽어 저 세상에 가서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심히 떨었지만 하나님은 그 때 그 갈릴리바다에 계셨습니다. 풍랑으로 아우성거리는 제자들 사이에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1절과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고 말씀합니다.
모든 시끄러운 것이 지나가고 세미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바람 소리, 천둥소리, 당황하여 제자들이 아우성거리는 소리 속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 소리가 다 지나간 후 세미하게 들립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25절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라왔습니다. 곁에서 수많은 이적을 경험하고 주님으로부터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 가운데서 일어난 경이로운 이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에게만 가능한 일이 그들이 따랐던 이스라엘의 한 선생에게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성큼 다가온 것입니다.
신명기 26장17절을 보면,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예배가 예배다워집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기도의 자세가 바뀝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삶의 태도가 영적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내 믿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믿음의 한계를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한계 때문에 그 신앙이 무미건조한 경우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세계는 어떤 한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 깊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놀라움과 새로움의 연속입니다. 마치 우리가 표면 위의 바다만을 보다가 바다 밑의 세계를 볼 때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그 깊이를 더해 갈수록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 보았던 예수님이 그런 차원의 경이로운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으로만 알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의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 천지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믿음에는 경이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경이로움이 없다면 구태의연한 종교적 습관만 반복될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의 교회가 빠른 속도로 죽어가고 있고, 유럽의 교회는 예배당이 텅 비어 있습니다. 예배당에 몇 몇 노인들만이 서글프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회의 성장은 마이너스로 전환했습니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학교의 쇠퇴는 그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주님이 더 이상 경이로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내가 주님을 알고 있다는 교만이며, 또 하나는 영적 무관심입니다.
복음이 들어간 나라 중 많은 나라들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사례가 많습니다. 그런데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따라서 교만한 마음도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특히 편안한 생활에 익숙하여 모든 것을 편리 위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극장이 있듯이 자동차예배도 생긴다고 합니다. 힘들게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놀러 가는 길에 자동차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안 드리면 좀 불안하니까 자동차예배를 통해 그것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문화의 조류가 무엇을 말합니까? 더 이상 주님은 경이로움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예배당은 화려한데 그 신앙까지 화려한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은 영적 분위기가 풍기지만 신앙까지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조직과 시설이 현대문화에 빠르게 적응해 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 문화에 익숙한 나머지 교회문화에 따른 생활을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종교적인 열심이 있어서 이것을 믿음의 전부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 신앙 속에 주님에 대한 경이로움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에 경이로움이 빠지면 그것은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살아있고 운동하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것이며 역동하는 것입니다. 놀라움과 새로움이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바다 표면에서 시작한 신앙이 해를 거듭할수록 바다 밑의 경이로운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에베소서 4장15절을 보면,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말씀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놀라움과 새로움이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신비로운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편안하게 책상머리 맡에 앉아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광풍 자체는 험한 세상에 비유됩니다. 잠언 1장27절을 보면,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말씀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광풍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입니다.
광풍은 갑작스럽게 몰아칩니다. 잔잔한 호수였다가 광풍이 몰아쳐서 바다가 범람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잔잔한 호수와 같은 인생에도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상황이 바뀝니다.
하루 밤 사이에 큰 질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큰 사건이 정리되기도 전에 이어서 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바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3장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람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광풍과 같은 위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광풍이 어디서 온 것인가 알았다고 해서 그 광풍이 없어지거나 그 광풍이 비껴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광풍의 출처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광풍을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것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삶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삶은 튼튼하고 안정성 있는 자가용을 타고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작고 위험한 배를 타고 어디서 불어 닥칠지 모를 풍랑의 위기를 감수하고 바다 위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바다는 문제가 갑자기 생깁니다. 인생의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위기가 언제 어디서든지 발생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작고 위험한 인생의 배에 나 혼자 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타고 있는 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배경을 의지하고 환경을 의지합니다. 축적해 놓은 재산이 많고, 노후준비가 잘 되어 있고, 가정이 평화롭고, 그런대로 건강도 괜찮다면 내가 타고 있는 배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전하지 않습니다. 어떤 배경도 환경도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인생의 바다 앞에서 ‘주님을 믿는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었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풍랑 앞에서 아수라장이 되었던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 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기치 않게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풍랑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거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풍랑보다 거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 풍랑을 삼킬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헤르몬산과 갈릴리 바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세계입니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풍랑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에서 발생하는 바람입니다. 결국 이 바람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바람입니다.
비록 바람이 임의로 불어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바람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바람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광풍은 사람의 뜻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는 상관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몰아닥친 광풍은 제자들의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는 상관있습니다.
이 광풍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광풍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풍 속의 제자들은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나의 의지가 가장 밑바닥에 이르러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부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가서 7장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참조-호12:6, 히12:2)
예수님이 잠들어 있는 동안은 죽음이 삼킬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이 잠들어 있는 동안은 죽음이 삼킬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는 신앙생활, 덮여진 성경책, 사라진 찬송소리, 간절함이 사라진 기도를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기 상황 속에서 뿐만 아니라 평상의 삶 속에서 일깨워야 합니다.
광풍의 끝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의 광풍이 지나고 또 하나의 광풍이 찾아오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가장 큰 광풍은 죽음이라는 광풍입니다. 이 광풍은 아무도 비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광풍 앞에서 내 영혼의 구원을 바라보며 내 영혼을 잔잔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 인생을 위협하는 바람이 있지만 다른 바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모든 광풍을 잠잠하게 하는 바람입니다. 불안 속에 떨고 있는 내 영혼도 잔잔하게 하는 바람이 성령의 바람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는 주님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모르게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내 스스로는 평안을 찾을 수 없지만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인해 광풍 속에서도 평안을 찾습니다.
결론적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은 해가 어두워지고 빛이 가리워지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하늘이 빛을 잃었습니다. 광풍이 몰아치는 날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둥소리가 요란한 날입니다. 주변이 암흑처럼 됩니다. 더구나 바다 위의 놀은 배를 전복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바다 위의 놀이 위협적으로 나를 공격하고 하늘의 해가 어두워져 주변이 깜깜해 지더라도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곳에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