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혈루증 여인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8장, 혈루증 여인
혈루증은 만성자궁출혈병이라고도 합니다. 여자의 규칙적인 생리현상 외에 불규칙적으로 피를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장기적으로 출혈을 하게 되면 몸에 몇 가지 이상증세가 나타납니다. 과다 출혈시 피가 신체중심기관으로 쏠리게 되는데, 신체에서 열을 내는 근육에 피가 가지 못해서 한기를 느끼게 됩니다. 얼굴의 핏기도 신체중심기관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창백해 집니다. 갈증도 생깁니다. 갈증이 생기는 것은 탈수현상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산소증으로 인해 호흡이 가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혈루증은 전통적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하나님께 범죄한 대가로 받는 징벌로 이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병은 부정한 병으로 여겨졌고,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자로 병이 나을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즉 혈루증은 종교적으로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육신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예수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 뒤로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따라 붙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녀를 막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이고, 격리 대상이라고 생각되던 그 병자를 가까이 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 저주받은 병이고, 사회적으로 격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붙들어야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을 보면, ‘큰 잔치 비유’ 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는데 잔치할 시각에 종들을 청함을 받은 자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이라고 하고, 한 사람은 소 다섯겨리를 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명령하였고,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들었다는 이유가 그들이 한결같이 사양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원래 청함을 받지 못했지만 큰 잔치의 참석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영적 의미에서 죄인들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2장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예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경륜이 오래 될수록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께 항상 긍휼만을 구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함에 있어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나의 모든 의로움을 버리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내 신앙 가운데 무엇이 사라져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혈루증 앓던 여자와 같이 필사의 각오로 주님을 붙들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혈루증 앓던 여자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병약한 몸이지만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순간만큼은 젖 먹던 힘까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순간만큼은 종교적 압박감, 사회적 압박감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 주변으로 무리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여자의 마음에 예수님께로 가야한다는 집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나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종류의 방해물들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봐야 소용없다고 속삭입니다. 우리는 내 귀전을 때리고 내 마음을 속이고 있는 이 사단의 세력까지 물리쳐야 합니다.
드디어 여자는 예수님 뒤편에 도달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가락이 닿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12년 동안 괴롭히던 하혈이 멈추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님, 이 많은 군중들이 서로 밀치고 있는 것을 보시고도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만진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셨지만, 계속 둘러보시기만 하셨습니다. 여자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사랑스럽고 다정한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밀치고, 저 사람이 예수님을 밀치고 있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주변만을 맴돌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손을 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 예수님의 옷 가에 믿음의 손을 대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종교적인 이유로, 사회적인 이유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친목을 위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와서 주님의 옷 가에 믿음의 손을 대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여자가 혈루증을 앓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올 일이 있겠습니까? 본문의 여자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지 않았다면 필사의 각오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여자에게 있어 혈루증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대의 사람을 이렇게 비유하였습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세대 사람들이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시는 순간에 거의 대부분의 무리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단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백부장 한 사람의 고백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반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심과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을 반가워하셨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자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들키지 싫어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반기셨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았지만, 혈루증 여인은 자신의 병 때문에 울며 가슴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이 전해지자 자신의 마음에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여자의 믿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 는 말을 가끔씩 듣고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나를 배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나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나를 속이지 않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는 주님의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자가 12년 동안 습득한 것이 있다면 고칠 수 없다는 현실입니다. 43절을 보면, “아무에게도 고침 받지 못했다.” 합니다. 그녀는 혈루증이 생긴 후,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용하다는 의원도 찾아다니고, 좋다는 약도 써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나병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일을 들었습니다. 또한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병자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아이들과 여자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으신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주님의 권능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사랑을 믿은 데로 응답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희박한 가능성의 문제라면 쉽게 포기합니다. 지금까지 가난하게 산 사람은 앞으로도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병이 낫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병이 낫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문제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지금까지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가난하다고 앞으로도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건강치 못하다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정문제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까지 변화되지 못했다고 해도 이제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살아왔어도 이제는 주님 안에서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자가 지금까지 낫지 못했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치유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우리에게서 있어 그것이 12년이 된 문제든, 24년이 된 문제든, 36년이 된 문제든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된 문제라도 주님의 옷 가를 만지면 응답받습니다.
누가복음 18장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 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붙들게 합니다. 기도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전진하게 합니다. 기도가 쌓이게 되면 어느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됩니다. 사단이 당해 내지 못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포기한 것이 있습니까? 내 마음 속에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생각한 것이 있습니까? 나의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나아감에 있어 스스로 어떤 한계상황을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혈루증 앓던 여자가 모든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주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모든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많은 무리들 중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옷 가에 믿음의 손을 내미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