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누가복음

누가복음 21장, 무화과나무

영구한도성 2022. 8. 17. 22:39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29 And he spake to them a parable; Behold the fig tree, and all the trees;
30 When they now shoot forth, ye see and know of your own selves that summer is now nigh at hand.
31 So likewise ye, when ye see these things come to pass, know ye that the kingdom of God is nigh at hand.
32 Verily I say unto you, This generation shall not pass away, till all be fulfilled.
33 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but my words shall not pass away.
34 ¶ And take heed to yourselves, lest at any time your hearts be overcharged with surfeiting, and drunkenness, and cares of this life, and so that day come upon you unawares.
35 For as a snare shall it come on all them that dwell on the face of the whole earth.
36 Watch ye therefore, and pray always, that ye may be accounted worthy to escape all these things that shall come to pass, and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37 And in the day time he was teaching in the temple; and at night he went out, and abode in the mount that is called the mount of Olives.
38 And all the people came early in the morning to him in the temple, for to hear him.

29 이에 譬喩로 이르시되 無花果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自然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 내가 眞實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世代가 지나가기 前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 天地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操心하라 그렇지 않으면 放蕩함과 술醉함과 生活의 念慮로 마음이 鈍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臨하리라
35 이 날은 온 地球上에 居하는 모든 사람에게 臨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將次 올 이 모든 일을 能히 避하고 人子 앞에 서도록 恒常 祈禱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 예수께서 낮에는 聖殿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橄欖園이라 하는 山에서 쉬시니
38 모든 百姓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聖殿에 나아가더라

누가복음 21장, 무화과나무

 

 

 

20절에서 24절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며, 25절에서 28절은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때에도 징조가 있고, 인자의 오심 때도 징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때 징조는 어떻습니까? 20절을 보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고 말씀합니다.

 

A.D 66년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저항하게 되는데, 4년 후인 A.D 70년에 마사다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괴멸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로마의 지독한 포위공격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이라는 것은 ‘로마의 포위공격’ 을 말합니다.

 

전쟁에 여러 공격 방식이 있겠지만 로마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위해 원으로 둘러싸면서 압박해 왔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은 외부와 교통할 수 없었으므로, 먹을 것이 없어서 주민들이 서로 잡아먹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도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유린당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포위 공격에서 110만 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수의 사람들이 죽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혀 갔다고 말했습니다. 유대나라는 이 전쟁으로 완전히 말살된 것입니다. 성전은 불탔으며, 폐허가 되었습니다.

 

인자의 오심 때의 징조는 어떻습니까? 25절을 보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납니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게 됩니다. 26절을 보면,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립니다.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는 것은 천체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천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우주질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천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게 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말씀합니다.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나고, 바다 물결이 놀라고, 천체가 흔들리는 이유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해와 달과 별의 주인이시며, 바다의 주인이시며, 이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나타날 때 자연계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과 인자의 재림 예언을 하신 후,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말씀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징조가 특별한 징조가 아니라 상식적인 징조라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싹을 보고 계절을 알 수 있듯이, 자연계의 현상을 보고 자연계의 주인이신 인자의 재림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최근 일본 대지진을 포함한 지구 곳곳의 대지진들, 지진해일이라고 하는 쓰나미, 지구 오존층의 파괴, 지각변동, 이상기후현상 등 자연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 현상들을 두고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무화과나무의 싹을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듯이 우리는 이러한 것을 보고 인자의 재림이 가까이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모든 자연인이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계시이고, 특별계시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일반계시에 속합니다.

 

주님께서 일반계시를 사용하실 때는 말씀을 듣는 대상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까지 포함할 때입니다.

 

인자가 오시기 전 까지는 아직 모든 자에게 구원의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에게 구원의 기회가 있지만 그 기회가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차면 기회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때가 찰 때가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때의 시점입니다. 1년 후일까? 10년 후일까? 아니면 100년 후일까? 아니면 1,000년 후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 때의 시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마지막 때를 향해 빠른 속도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마지막 때를 향해 빠른 속도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데, 그 사실만큼 확실한 것이 나의 인생이 마지막을 향해 빠른 속도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의 인생은 오늘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10년 후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지, 50년 후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아니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내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의 마지막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 보다 오늘 나는 인자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인자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이든 상관없습니다.

 

사실 기회는 오늘 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무화과나무의 싹은 이미 오늘 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면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방탕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라이팔레’ 인데 많은 술을 마신 결과 수치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생활의 염려는 하루하루의 삶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가리킵니다. [고전6:3,4]

 

방탕함과 생활의 염려라는 것은 영적 삶에는 관심이 없고 육적 삶에만 관심이 있는 모든 태도를 말합니다. 육적 삶에만 관심이 있게 되면 마음이 둔하여 집니다. 마음이 둔해 진다는 것은 영적 마음이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세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육적 삶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과 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노아시대 사람들에 대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말합니다. 일상의 삶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일상의 삶 자체가 아니라 일상의 삶만 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수가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평신도 시절 겉으로 보면 별로 문제가 없었던 신자였습니다. 저는 주일예배를 잘 지켰고, 주일학교 교사였으며, 집사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제직회 부회장이며 제직회 서기로서 직분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 감당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제 마음은 생활의 염려로 가득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제 몸은 예배당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한 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기도하게 되었고, 예배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제 오른 쪽 어깨 쇄골에 해당하는 뼈는 사고 당시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흔적이 있습니다. 다시 붙을 때 조금 엇갈리게 붙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흔적이 있는데, 폐에 있는 피와 공기를 뽑아내기 위해 관을 삽입했다가 뺀 흔적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몸에 이러한 흔적을 남기신 이유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이 흔적을 남기신 이유는, 사고 당한 때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음을 기억하고 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36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말씀합니다.

 

저는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며, 직분을 감당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어지고 형식화 되고 생활의 염려로 늘 시달리고 있었던 것 자체가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사고를 당한 후,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눈의 비늘같이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듯이, [행9:18] 저 역시도 사고로 인해 마음이 열리고 다시 보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노아시대 방주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시대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구원의 길은 오직 방주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세상은 종말의 시대입니다. 히브리서 9장26절을 보면,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세상 끝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방주가 되시며,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현재에 닥친 세상 일만 생각하고 장래에 닥칠 영혼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내일 일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까지 살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예배다운 예배 단 한 번만이라도 드리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는 늘 결핍을 느끼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단 하루라도 완벽하게 살아보았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지 않습니까?

 

수많은 신자들이 회심한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오래 된 만큼 열매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때로는 열매가 거의 보이지 않고 잎사귀만 보일 때도 있지 않습니까?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아마 오래 사는 것이 영적으로 더욱 더 위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는 날 동안 두려움이 축적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것은 죽을 시간을 목전에 두고 있고, 매일같이 죽음을 예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 1절을 보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 보다 나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전혀 예기치 않은 사이에 갑자기 죽어 가는 것처럼, 인자는 우리가 전혀 생각지 않은 시간에 찾아옵니다.

 

마지막 순간이 닥치게 되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전 생애에 대하여 전혀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부주의하고 태만한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슬기롭고 행복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있어서도 평상의 삶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세상을 경멸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인내하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쌓일 때 죽음의 순간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중요한 일이 많아도 나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영혼의 문제에 있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장차 누가 나의 영혼을 지켜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이 가장 귀중한 때입니다. 지금이 은총을 받을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을 받을 때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마지막이 후회와 두려움이 되지 않도록, 오히려 그 때가 즐거움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현재의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이제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을 외면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계단을 한 걸음씩 밟아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 충실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삶을 마치 나그네처럼, 지나가는 행인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래야 머물렀던 장소에 미련이 없고, 이동하기가 쉽습니다.

 

히브리서 10장37절을 보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말씀합니다. 지체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주님께서는 재림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스탠바이(stand-by)가 된 상태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싹이 나기만 하면 오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여러 상징적 의미로 쓰입니다. 본문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재림의 징조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무화과나무는 하나님나라의 풍요와 평안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주로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자랍니다. 무화과열매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주식으로 사용되었고, 그 때문에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의 원형은 하늘에 뿌리를 둔 우주의 나무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포도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가서 4장4절을 보면,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하늘에 있는 나무입니다. 자기 포도나무와 자기무화과 나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풍요로서 평안으로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무화과나무는 봄에서 여름에 걸친 시기에 꽃이 피고, 그 열매는 7월에서 10월 사이에 수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무화과나무는 항상 꽃이 피어있고, 항상 열매가 열려 있으며, 그 열매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를 통해 인자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무화과나무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이 각자의 포도나무와 각자의 무화과나무에 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공생애-공인으로서의 생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애]

 

37절과 38절을 보면,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집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산에 가셨습니다. 산에서 쉬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시간이 잠을 잘 시간인데, 산에서 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잠을 잤던 때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될 때였습니다. [마8:24, 막4:38]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만이 보일 수 있는 탁월함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모인 백성들 한가운데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자기 시간이 없이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 올라가서 그 밤을 하나님과 더불어 별 아래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이 자기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을 통하여 다음 날 백성들 앞에서 영적권세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같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서 출발하여 백성들에게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임재의 출발점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이었습니다. 그 산이 공생애를 살게 한 영적 동력원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감람원이라는 산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산은 어떤 장소일 수 있고, 어떤 시간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새벽기도 장소가 감람원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 모두가 잠이 든 자정시간이 감람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감람원을 두고 하나님과 독대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영성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영성이 무엇입니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여도 잠을 잘 수 있는 영성이며, 평안의 때 세상에 물들지 않고 깨어있는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 영성은 무화과나무 싹을 살피며 준비하는 영성입니다.

 

보이스카웃이 경례를 할 때 붙이는 구호 중에 ‘준비’ 라는 것이 있습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을 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오늘 인자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은 미루어도 되지만, 이 일은 미루어서는 안 될 입니다.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 있는 사람은 지금 교회로 돌아와야 하며,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그 마음이 지금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교제하며 그 삶이 은혜로운 사람은 더 은혜로운 삶을 위하여 지금 더욱 기도하여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며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12절을 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합니다.

 

인자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만 하면 되었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보이고, 자신의 연약함이 보여서 그러기에 주님을 더욱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주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이 인자 앞에 지금 서더라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