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장, 성찬식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使徒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苦難을 받기 前에 너희와 함께 이 逾越節 먹기를 願하고 願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逾越節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盞을 받으사 感謝 祈禱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臨할 때까지 葡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感謝 祈禱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爲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行하여 나를 記念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後에 盞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盞은 내 피로 세우는 새 言約이니 곧 너희를 爲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者의 손이 나와 함께 床 위에 있도다
22 人子는 이미 作定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禍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中에서 이 일을 行할 者가 누구일까 하더라
누가복음 22장, 성찬식
성찬식에 관한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화체설(化體設,Transubstantiation)입니다. 이것은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면 그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가톨릭의 교리입니다.
둘째는, 성체 공재설(聖體共在設,Consubstantiation)입니다. 이것은 성찬에 쓰인 재료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예수의 피와 살이 그 재료들과 함께 나타난다는 마틴 루터의 주장입니다.
셋째는, 영적 임재설(靈的臨齋設,Spiritual presence)입니다. 이것은 떡과 포도주를 믿음으로 받을 때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오는 영적인 축복이 있다는 칼빈의 주장입니다.
넷째는, 기념설(記念設, Memorialism)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임재를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도들을 위한 효과를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쯔빙글리의 주장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것은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다.” 고 할 때는 화체설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19절에서 “나를 기념하라.” 할 때는 기념설이 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이 성체공재설과 영적임재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리적 입장에 따라 이렇게 주장이 다르긴 하지만 성찬예식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자세는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찬예식에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참예할 뿐 아니라 떡과 잔을 받을 때 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참예해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떡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대지진에 따른 여러 일화들이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잿더미가 된 집에 어떤 물건을 가지러 들어갔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할아버지 손에는 사진첩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사진첩은 금전적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생업과 관련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그 사진첩을 찾으러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진첩에는 가족의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에 대한 추억이 목숨과 바꿀 만큼 귀중했던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에게 있어 사진첩에 있던 추억은 단지 지난날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할 뿌리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말씀하십니다.
일본대지진 때 그 할아버지는 추억이 담긴 사진첩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성찬예식을 통해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더욱 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찬의 떡을 먹으며 주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내가 오늘날 주님 안에서 살며 주님 안에서만이 살아야 할 이유를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에서 먹는 빵은 평범한 빵입니다. 그러나 느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잔에 대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적인 관점에서 언약이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곧, 선물을 가지고 사람에게 다가오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그것을 지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러한 언약의 연속성은 인간이 어떻게 율법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죄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의 제사제도는 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이와 같습니다. “너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순종할 수 없으니 내가 대신 죽음의 피로써 그 율법을 이루겠다.” 본문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옛 언약 속에서는 멸망 밖에 없으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새 언약, 곧 하나님의 아들이 피흘리심으로 직접 속죄제사를 드림으로써 죄를 속하는 언약을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진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었으므로 나는 이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은 쉽게 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헬라인은 시간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독자적인 형용구 중에, ‘시간, 그것은 모든 것들을 쓸어가 버리는 것이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사에 마음이 흐트러지고 억눌릴 때에는 이들이 나를 잊을 것이지만 이들이 때때로 나의 집에 와서 평화와 고요에 잠겨 이 성찬예식을 행하면 이들이 다시 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예식을 통해서 다시금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사랑의 깊이를 더하는 예식이 될 것이며, 주님을 떠났던 탕자에게는 다시금 주님 옷자락을 만지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복잡한 논리나 신학이 아니라 성찬예식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성찬예식이지만 믿음으로 참예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