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장, 하나님의 안식
히브리서 3장, 하나님의 안식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노예생활로 부터 구원해 주셨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안식은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새로운 땅에서 그들만의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12:9, 왕상8:56)
그런데 히브리서 4장 8절과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안식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있어 안식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날이 아니라 다른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날은 완전한 안식의 날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날입니다. 또한 이 날은 악의 세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의와 공평이 실현된 날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13절을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말씀합니다. 이 날은 더 이상의 수고가 없는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쉼을 누리는 그 날이 완전한 안식의 날입니다.
비록 완전한 안식의 날은 아직 기다려야 하지만,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 속에는 소망이 없지만 일단 그 애굽에서 나오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고 살던 땅은 애굽 땅이고, 주님을 만난 이후의 땅은 출애굽의 땅입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세월은 애굽 땅의 세월이었고, 내가 주님을 만난 이후의 세월은 출애굽의 세월입니다. 내가 주님을 몰랐을 때는 죄가 죄인 줄도 몰랐지만, 내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죄가 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애굽과 출애굽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애굽 땅은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는 땅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땅은 완전한 안식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하지만 부분적으로 누립니다. 부분적으로 누리면서 진정한 안식의 날을 소망합니다.
애굽에서 그들이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를 먹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 해도 애굽의 노예였을 뿐입니다. 소망이 없는 노예였을 뿐입니다. (출16:3)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후, 그들 앞에 펼쳐 진 땅이 광야였지만 그 땅에서는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지 못하고 생활이 불편해도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는 확연히 다릅니다. 주님을 만난 후 부터 이 땅은 약속의 땅이 되고, 주님을 만난 후 부터 시간은 약속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기 전과 주님을 만난 후는 신분이 다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은 단지 자연인(自然人)에 불과합니다. 자연인은 생물학적 육체를 가진 인간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는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거룩한 백성은 생명의 차원에서 자연인과 완전히 다릅니다.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헬라어로 프쉬케라 하고 거룩한 백성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조에라고 합니다. (고전15:44-49) ‘프쉬케’는 육체적 생명을 뜻하고, ‘조에’는 영존하는 생명을 뜻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생명은 육체적 생명 ‘프쉬케’에서 영존하는 생명 ‘조에’로 바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비록 불신자들과 겉모습이 같고, 불신자들과 같이 이 세상 속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신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다르고, 생명의 차원에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다른 것입니다.
1절 상반절을 보면, 성도들을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 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거룩한 형제들’ 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별(聖別)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안식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때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날이 옵니다. 어떠한 흠도 없이 어떠한 부족함도 없이 섬기는 날이 옵니다. 그런데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온전히 섬기지 못합니다. 어떤 흠이 있고, 어떤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흠이 있고 부족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이유로 안식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곤경에 빠져 안식을 잃기도 하고, 가정불화로 안식을 잃기도 합니다. 건강의 문제 때문에 안식을 잃기도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문제가 없고, 가정이 평화롭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도 안식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안식을 잃습니다. 영적존재인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안식이 없습니다. 안식은 단지 마음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저는 맛있는 식사 후, 따뜻한 커피 한 잔만 마셔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풍요롭고 평화롭습니다. 안식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실존적으로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해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입니다. 내 영혼의 구원이 하나님 안에서 확신되는 것이 안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안식을 이 세상에서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이 세상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는 날이 있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통과해야 할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은 광야입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통과해야 할 땅이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거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300km가 조금 넘는 거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10km만 걷는다 해도 1달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도착하는데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합니까? 약속의 땅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었고, 이스라엘 백성 내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바람에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2세대가 그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와 같은 인생을 통과해야 합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며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기도 하고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게 되는 것은 교만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완고한 마음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합니까? 11절 말씀을 보면,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의 노함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19절 말씀을 보면,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결국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초래하는데, 이 불신 때문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불신은 근본적인 불신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믿음이 연약해 질 수 있고,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연약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은 완전히 배교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을 보면, 배교자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말씀합니다. 타락한 자는 주님을 믿지 않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과 똑 같은 불신자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 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테스 호모로기아스 헤몬’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신앙고백(마16:16)을 뜻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전권대사를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대권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으로 부르는 것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던 사역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어 지성소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제물이 되신 주님으로서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생각을 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대화도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 없이 대화를 하게 되면 실수를 합니다. 생각 없이 대화를 하면 상대방에 대한 호칭도 실수합니다. 권사님을 집사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집사님을 권사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심지어 목사님을 장로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장로님을 목사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호칭에 대한 영적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러 오신 사도이시며, 나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신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영적 갈등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러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희미해 질 때 나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4절에서 6절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지은 분이며, 그 집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3절을 보면,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곧 교회를 가리킬 때 하나님의 ‘집’ 이란 말이 사용됩니다. (엡2:21,22 딤전3:15, 딤후2:20, 벧전4:17)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집을 지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곧 성전이신 예수님의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요2:21)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성전을 이루는 예수님의 몸에서 각 지체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성전이시면서 성전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6절을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말씀합니다. ‘아들로서’ 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의 신분입니다. 즉 다스리는 신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친히 성전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성전을 다스리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우상이 난무합니다. 돌이나 쇠붙이로 조각한 우상 뿐 만 아니라 마음속의 우상도 난무합니다. 돈이 우상이 되고, 출세와 성공이 우상이 됩니다. 이기적인 욕망과 쾌락주의도 하나의 우상이 됩니다. 이러한 우상이 내 마음 가운데 둥지를 틀려고 할 때 우리는 친히 성전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해야 하며, 성전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나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6절 말씀처럼,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10절에 ‘이 세대’ 를 문자적으로만 보면 히브리서의 기자가 살던 세대입니다. 그런데 9절 말씀에 따르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이 세대는 단순히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않던 왕권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할 수 있고(사5:1-7),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행하던 표적과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마12:39, 16:9 눅11:29) 적용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세대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포되는 경고를 듣기도 하며 그 말씀을 통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목격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해당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경고는 신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말씀합니다.
본문은 믿지 아니하는 마음과 악한 마음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사람에게 있는 죄악 된 마음은 악한 생각이나 살인이나 간음이나 음란이나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의 마음입니다. (마15:19) 그런데 이런 마음 보다 근본적으로 악한 마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마음입니다.
가족관계에서 가장 불행한 가족은 서로에 대해 불신하는 가족입니다.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하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믿지 못하는 가족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악한 죄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말씀합니다. 시작할 때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믿을 때를 의미합니다. 처음으로 믿을 때 그 은혜를 끝가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됩니다.
상담학에 따르면 부부사이가 좋지 않아지고 이혼 직전까지 갈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죽고 못 살아 연예하던 시절이나, 아니면 결혼해서 서로에 대해 좋았던 기억들을 떠 올리고 그것을 적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과의 첫 사랑에 대한 은혜에 떨어질 때 다시 첫 사랑을 기억해서 그 은혜를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있으면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17절에서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노하신 대상이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 라고 합니다. 범죄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노정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란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나온 사람들인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민14:29,30)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안식이 하나님을 시험하며 그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시7:8-14 9:4-8 롬1:1-5)
그러므로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불신으로 돌이키는 사람은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하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7절과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