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장,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히브리서 3장, 오늘이라 일컫은 동안에
7절에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다는 것은 성령께서 시편 95편7절을 통해 이르신 말씀입니다. 시편에서는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이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에는 2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의 백성에게 그의 양들에게 그의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백성들, 그의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불순종했던 것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마음이 완악해 지면 하나님의 음성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 완악해 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완악해 졌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 완악해 졌습니다. 만나라는 음식을 하늘로부터 내려 주었지만 나중에는 먹을 고기가 없다고 완악해 졌습니다. 가로막고 있는 홍해, 그리고 먹을 것, 마실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직면한 현실문제입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바로 현실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마다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른 문제가 생기면 완악해 졌습니다.
특히 8절에서 시험하던 날이라는 것은 두 개의 지명 맛사와 므리바에서의 사건입니다. (출17:7, 민20:2-5) 맛사와 므리바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거역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민수기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면 물이 솟아 나오리라고 일러 주셨지만, 노여움 때문에 반석에게 말하지 않고 반석을 쳤습니다. 그 결과 물은 솟아 나왔지만 모세 역시 불순종에 대한 벌로써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현실문제 앞에서 기도하는 것과 현실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이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현실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면 “당신은 내 입장이 아니라서 모른다.” 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결국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는다.” 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했습니다. 노예로 살던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도 잊어버렸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하나님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송두리째 잊게 됩니다. 구원의 하나님도 잊고 하나님께서 내게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믿지 않고 살던 때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면 그 사실 마저도 잊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다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라.’ 는 음성입니다.
우리는 현실 문제 앞에서 그는 나의 하나님이심을 여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임을 믿어야 합니다. 양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도 없고,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 곳에서 헤쳐 나올 수도 없습니다. 목자가 자신을 지켜 주어야 하며, 목자가 건져주어야 합니다. 목자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하며, 목자가 마실 것을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하고,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여 주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는 것밖엔 없습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유목민이나 사막을 방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말 그대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생활을 하게 한 것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하루하루 믿는 것입니다.
13절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이라는 것은 오늘 하루를 뜻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을 보면, 시간과 때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1절을 보면,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 고 말씀합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가 있고, 취직할 때가 있고, 결혼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가 있고, 집을 살 때가 있고, 이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직장에 출근했다가 때가 되면 퇴근합니다. 우리는 때가 되어 수요예배에 참석했고, 때가 되면 이 자리를 떠납니다.
전도서에서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지나가지 않고 항상 오늘인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지키는 때입니다. 세상사는 다 때가 있지만 믿음을 지키는 때는 항상 오늘입니다. 오늘 하루입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동안’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 생명이 있음을 뜻합니다. 보다 좁은 의미로 본다면 우리는 ‘지금’ 이라는 시간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생명이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죽은 자에게는 ‘지금’ 이라는 시간이 없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시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시간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무의미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흐름도 무의미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시체들에게는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지금 믿음을 지킬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라는 시간 속에 여러 분주한 일에 매달립니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급해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라는 시간 속에 매달려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 이라는 시간 속에 매달려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인도하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안식처입니다. 자동차 악세레타를 밟고 운전을 하면 자동차는 해당 목적지에 데려다 줍니다. 그와 같이 믿음이라는 악세라타를 밟고 운전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처로 데려다 줍니다. 믿음이라는 악세레타를 밟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진하는 것을 뜻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따라 이동하였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진하는데도 운전을 잘 해야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필요하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고, 불필요하게 먼 산이나 엉뚱한 곳을 바라보아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잡생각이 있어서도 안되고, 옆 사람의 이야기에 신경 써도 안 됩니다. 그러면 사고를 당합니다.
믿음의 운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처까지 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뒤가 생각날 때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를 기억해야 합니다. 불필요하게 먼 산이나 엉뚱한 곳을 바라보아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 죄의 유혹이 생기면 먼 산이나 엉뚱한 곳을 바라봅니다. 망상을 쫓기도 하고, 죄의 낙을 쫓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머릿속에 잡생각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옆 사람의 이야기를 신경 써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든지, 그가 주님을 따르든지 말든지 나는 오직 주님의 뒤를 쫓아야 합니다.
이것이 운전을 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운전을 잘 하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미혹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말씀합니다. 마음이 미혹되면 그 영혼이 깜깜해 집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과거 적지 않은 세월 그렇게 지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학교 교사로서, 제직회에서는 서기로서 직분을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제 영혼은 깜깜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온통 돈을 벌 궁리만 하였고, 주님을 찾지 않았으며,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아등바등 하였습니다. 그 때 제 아버지는 위암으로 투병중이셨는데,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아버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제 삶이 영적으로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었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고를 당한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되고, 조금씩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미혹에 빠지면 앞 뒤 분간도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둘째는 믿음의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말씀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 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불신자체가 악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표적인 악한 마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것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분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분의 존재는 믿지만 그 분의 인격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은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영이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사탄이 사람보다도 더 잘 압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증오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악한 마음입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처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만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있어야 믿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있어야 지금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안식처에 도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른 데로 핸들을 틀지 않습니다.
셋째는 믿음의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완고함을 버려야 합니다. 완고하게 되는 것은 죄의 유혹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말씀합니다. 완고하게 되는 것이 겉으로 보면 현실 문제 때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죄의 유혹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기가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완고함은 현실문제가 아니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죄성입니다.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죄성을 혼자 잘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족이 도와줘야 하고, 교우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본인이 완고한 가운데 있는데, 옆에서 그 완고함을 부채질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도록 서로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완고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영적인 부분에서 단절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고,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그 심령에서 은혜가 사라지고, 메말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옆에서 도와 줄 때 도움 받는 이는 이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회개케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완고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그 완고함을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간직하고 있다면 믿음의 핸들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완고함을 버려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미혹 때문에 믿지 못하고, 악한 마음 때문에 믿지 못하고, 완악함 때문에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보여준 불신의 성격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모세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고 불신한다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향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신뢰와 순종을 언제 드러내야 하는가 하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루를 마치 일생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너무나 쉽사리 내일에 대해서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내일이라는 것이 꼭 온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안식처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제의는 오늘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에 대한 신뢰와 순종은 오늘 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신뢰와 순종을 보여야 합니다.
참으로 신뢰하면 순종을 따라오기 마련합니다. 신뢰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참으로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먹을 것이 없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광야와 같은 생의 고단함 가운데서도 생명수이신 주님을 믿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내가 영적으로 사는 길이며, 결국 순종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길입니다.
가나안 땅까지는 3개월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가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출애굽1세대는 들어가지 못하고, 출애굽2세대가 들어갔습니다.
즉 약속의 땅은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약속의 땅은 40년이 아니라, 3개월이 아니라, 하룻길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는 약속의 땅이 40년이 아니라 40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처에 도달하는 것도 세월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몇 년 더 살면 가게 되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믿음으로 도달하는 곳입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오늘 믿음으로 도달해야 하는 곳이 하나님의 안식처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도 죄성으로 인한 마음의 미혹과 완고함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종류의 미혹과 완고함과 악함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의 영혼이 깨끗합니다. 성도들의 영혼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데서 빛을 발합니다. 마치 번쩍하며 스파크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어떤 사탄의 권세도 무기력 합니다.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로 영적인 스파크를 일으켜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