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장, 하나님의 약속
히브리서 6장, 하나님의 약속
시편 42편5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 불안해하는가?’ 라는 것은 낙심과 불안으로 그 영혼이 몹시 피곤함을 말하는 탄식시입니다.
여기서 ‘영혼’ 이라는 것은 원어성경에서 ‘네페쉬’ 인데, ‘자아’ 혹은 ‘살아있는 존재’ 를 가리킵니다. 때로는 ‘호흡’ 을 의미합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생명이 유지되는 근원적인 영역을 ‘네페쉬’ 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곧 영혼이고, 영혼은 곧 육체입니다. 그러므로 ‘네페쉬’는 육체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 불안해하는가?’ 라는 것은 낙심과 불안으로 그 영혼이 몹시 피곤할 뿐만 아니라 그 육체도 몹시 피곤한 상태임을 말합니다. 낙심하다, 불안해 하다는 것은 ‘쏟아 붓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영혼을 쏟아 놓음으로써 몸의 에너지와 생명력이 고갈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삼상1:15, 시42:4 ‘통하다, 상하다’ 는 본래 ‘쏟아 붓다’ 는 뜻]
이 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피했던 슬픈 역사를 배경으로 쓴 시입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기는 기가 막힌 현실 앞에 상실감과 절망감에 젖어 있습니다. 낙심과 불안으로 자기 생명력이 고갈되는 극심한 현실 앞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는 다윗의 고백은 본문 19절 말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라는 말씀과 깊은 관련성이 있습니다.
다윗은 기가 막힌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닻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에픽테터스라는 사람은 “배라는 것은 하나의 닻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사람은 한 가지 희망에만 생명을 걸어서도 안 된다.” 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희망에만 생명을 걸었다가 그 희망이 좌절되면 그것으로써 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닻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부귀라는 닻, 명예라는 닻이 처음에는 큰 희망이 되는 것 같다가 결국에는 그것이 궁극적인 희망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자식도 궁극적인 희망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닻은 그런 닻이 아닙니다. 나중에 좌절하는 닻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닻은 하나님이란 닻입니다. 하나님이란 닻을 그 배에 달고 있는 사람은 다른 닻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닻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소망의 닻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는 기가 막힌 현실 앞에서도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이 그에게 소망의 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소망의 닻이 될 수 있는 것은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영생에 대한 확실한 약속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서 18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왜 확실한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맹세는 자기 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합니다. 왜냐하면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해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 [창22:16-18] 아무리 큰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의 맹세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100%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르 지방에서 불러내시어서 약속의 땅으로 보내실 때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5절에서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많은 자손들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18절을 보면, 그 약속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 16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13절의 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약속을 주셨는데, 나중에 주신 약속은 맹세로써 그것이 확실한 것이라고 증명하셨다.” 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확실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셨으므로 그 확실성이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변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못하시는 이유는 어둠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이며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실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소망이라고 합니까? 19절을 보면, 그것은 성소의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을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성소 안에서도 가장 신성한 장소는 지성소입니다. 휘장이란 것은 성소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성소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이 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 사람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이 대제사장도 지성소에 1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속죄의 날에도 대제사장은 지성소 안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공할 정도의 위험성을 가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고대의 유대교에 있어서는 대제사장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면전에 나갈 수 없으며 대제사장이라 하더라도 1년에 단 하루만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이 열렸다.’ 것입니다. 즉 옛부터 닫혀있던 길이 이제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뒤따르는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닫혀져 있었고 격리되어 있었던 지성소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렸는데, 주님을 믿는 자는 안전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낯선 존재였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의 인격과 그 분이 행하신 업적으로 인해 믿는 자마다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벗, 곧 친구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문이 닫혀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모든 사람에게 열린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 영혼에 어떤 위안이 됩니까? 18절 하반절을 보면,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고, 다윗처럼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가운데서, 피난처가 필요한데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피난처는 일시적인 도피처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안식처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윗처럼 낙심하고, 불안해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실존적으로 낙심하며,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내 영혼은 피곤하고, 내 육체도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그 영혼이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십니다. 그리고 결국 나는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게 됩니다. 입술에서, 심령에서 하나님을 찬송을 하게 된다는 것은 낙심과 불안해하는 마음이 없어졌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다윗처럼 찬송으로 점철된다면 그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 찬송하며, 앞으로 삶이 모두 찬송이며, 죽는 순간에도 찬송하며 죽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찬송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감상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나 확실한 약속을 말씀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19절의 영혼의 닻은 바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바람은 곧 성령이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내 영혼의 닻을 하나님께로 가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그 소망을 견고히 잡아가는 배의 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없으면 그 영혼은 늘 방황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떠난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살게 됩니다. 자기 계획과 목표대로 살아갑니다. 그 영혼에 닻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의 닻이 하나님께로 가게 하는 성령의 바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바람은 실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성령의 바람 때문에 내 영혼이 점점 하나님을 갈망하며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것은 그 성령의 바람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42편2절을 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노래합니다. 그리고 시편 62편5절을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노래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 집니다. 그 영혼의 침묵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게 됩니다. 그 때 삶의 모호함들이 사라지고 그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다닐 때, 과연 그가 자기의 삶이 쉽게 받아들여졌겠습니까?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많다고 하지만 아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었을 때,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서 모든 것이 이해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을 보면,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말씀합니다. 그 휘장 안에서 삶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내 영혼의 종착역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휘장 안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뒤를 따라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때문입니다.
약속이 없는 신앙생활은 종교입니다. 약속이 없는 신앙생활은 기쁨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20절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약속이 확실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을 때 모든 것들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지금 보다 더 좋은 보상이 있다는 약속을 믿을 때 얼마든지 댓가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로힘이라고도 하고, 여호와라고도 합니다. 임마누엘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지킨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약속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따라가는 가 하면 믿음으로 따라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리 미리 약속하신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지혜를 구하면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환난날에 피할 길을 내어 주겠다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은 액면 그대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데 있어 가장 장애 요소가 성급함입니다. 심지어 오늘 기도했다면 내일 기도제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몇 일 내에, 혹은 몇 달 내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몇 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나야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것은 나의 자식대에 가서야 기도제목이 성취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때에는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살아생전에 본 자손은 이삭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죽을 때에 뭇별과 같은 자손을 믿음으로 보며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앎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참다운 앎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안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와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른다면 아무런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평안이 있고, 약속의 말씀을 믿는 가운데 찬양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믿으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다윗같은 경우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망다니면서 하나님을 갈망했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