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전도서

전도서 1장, 참다운 지혜 feat.솔로몬의 지혜

영구한도성 2022. 9. 3. 20:17
16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16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智慧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智慧와 知識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 내가 다시 智慧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8 智慧가 많으면 煩惱도 많으니 知識을 더하는 者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16 I communed with mine own heart, saying, Lo, I am come to great estate, and have gotten more wisdom than all they that have been before me in Jerusalem: yea, my heart had great experience of wisdom and knowledge.
17 And I gave my heart to know wisdom, and to know madness and folly: I perceived that this also is vexation of spirit.
18 For in much wisdom is much grief: and he that increaseth knowledge increaseth sorrow.

전도서 1장, 참다운 지혜 feat.솔로몬의 지혜

 

 

16절에 지혜를 더 많이 얻었다는 것은 원어성경에서(히게달레티 웨호사페티) ‘지혜가 자라고 증가했다.’ 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저자 솔로몬이 지혜를 많이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지혜 안 에서 더 깊이 성숙하고 풍요로워졌음을 암시합니다.

 

지혜를 가지고 그것이 더 깊이 성숙하고 풍요로워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3가지 과정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첫째는 선천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세상의 여러 지식과 지혜를 빨리 이해하고 습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로 인해 여러 지식과 지혜를 빨리 이해하고 습득하였습니다. 솔로몬은 그 전에도 자기와 같은 사람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만큼 지혜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는 배우고 익히고 탐구하는 가운데 지혜를 얻고 성장합니다. 이것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자기 노력도 들어갑니다. 예의 주시하면서 관찰하고, 분석하는 가운데서 지혜를 얻고 그 지혜가 성장합니다.

 

셋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얻게 됩니다. 잠언 20장 29절을 보면,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말씀입니다. 백발이 무엇입니까? 백발은 연륜에 따른 지혜입니다. 이것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배우고 익히고 탐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지혜는 세월이 지나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세월 속에 다양한 경험 가운데 얻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지혜에 대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17절을 보면,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줄을 깨달았도다.’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각각 어떤 것인지를 바로 알아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택하고자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줄을 깨달았도다.’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어리석은 것이고, 무엇이 지혜인 줄을 파악하기 위한 시도(試圖) 역시 의미 없는 일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선천적인 지혜든, 후천적인 지혜든, 연륜 속에 묻어나는 지혜든 마치 바람을 잡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지혜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18절을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 지혜, 세상 지식의 한계입니다. 세상 지혜, 세상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번뇌가 쌓이고 근심이 쌓입니다. 번뇌와 근심이 많아지면 힘이 빠지고 정신적으로 쇠퇴해 집니다. 세상 지혜, 세상 지식은 사람을 웃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하나의 지혜나 지식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또 어떤 지혜가 있을까? 또 어떤 지식이 있을까? 하는 숙제만 남깁니다. 그런데 이 숙제는 영원한 숙제입니다. 아무리 풀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어떻습니까? 잠언 1장 7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잠언 6장 23절을 보면,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의 길입니다.

 

신학자와 신앙인은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신학자가 신앙인은 아닙니다. 조직신학을 전공한 학자라고 해도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등불로 삼고, 하나님의 법을 빛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계의 책망을 생명의 길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방 끈이 짧아서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신앙인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등불로 삼고, 하나님의 법을 빛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계의 책망을 생명의 길로 여기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 속한 생명은 분석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에 관한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 남부의 스바(현재 예멘으로 추정)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보석을 지참하여 솔로몬을 만났습니다. (왕상10장)

 

전설에 따르면 이 때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가짜 꽃과 진짜 꽃을 먼 거리에 두고 감별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빙긋이 웃은 후, 신하로 하여금 벌통을 가져오게 해 벌들을 그곳에 풀었습니다. 그러자 벌들이 진짜 꽃에 날아가 앉았습니다. 벌들이 가짜 꽃에 앉을 리는 없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은 생명끼리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꽃도 생명이고, 날아다니는 벌도 생명입니다. 이들이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은 하늘에 속한 생명입니다. 하늘에 속한 생명이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들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생명이 진짜 꽃이라면 그 꽃에 날아다니는 벌은 그 생명의 냄새를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 는 다른 말로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지혜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를 지키고 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에 대한 사랑을 자기 지식으로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예배를 사모하는 방법이 자기 지혜로 사모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 직분을 자기만족을 위해 감당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 지식, 자기 지혜, 자기만족은 결국 번뇌와 근심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그리스도가 그 주인공입니다.

 

‘십자가의 도’ 는 사랑입니까? 공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사랑입니까? 공의입니까? 십자가는 사랑이자, 십자가는 공의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동시에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참혹한 십자가 형벌을 당하셔야 했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동시에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회복을 ‘십자가의 도’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공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공의를 생각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잘못한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용기가 필요한 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등불로 삼고,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빛으로 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계의 책망을 생명의 길로 삼는다면 이러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