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레위기

레위기16장, 두 가지 속죄제물

영구한도성 2022. 11. 9. 22:58
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
6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5 이스라엘 子孫의 會衆에게서 贖罪祭物로 삼기 爲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燔祭物로 삼기 爲하여 숫羊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
6 아론은 自己를 爲한 贖罪祭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自己와 집안을 爲하여 贖罪하고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會幕 門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爲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爲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爲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爲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贖罪祭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爲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贖罪하고 아사셀을 爲하여 曠野로 보낼지니라

5 From the Israelite community he is to take two male goats for a sin offering and a ram for a burnt offering.
6 “Aaron is to offer the bull for his own sin offering to make atonement for himself and his household.
7 Then he is to take the two goats and present them before the LORD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8 He is to cast lots for the two goats—one lot for the LORD and the other for the scapegoat.①
▷ ①The meaning of the Hebrew for this word is uncertain; also in verses 10 and 26.
9 Aaron shall bring the goat whose lot falls to the LORD and sacrifice it for a sin offering.
10 But the goat chosen by lot as the scapegoat shall be presented alive before the LORD to be used for making atonement by sending it into the wilderness as a scapegoat.

레위기 16장, 두 가지 속죄제물

레위기 10장 1절과 2절을 보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규례를 어겨 분향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장 1절에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라는 말씀은 ‘아론의 두 아들이 규례를 어겨 분향하다가 죽은 후에’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하실 말씀을 위해서 ‘규례를 어기다가 죽은 아론의 두 아들’ 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십니다.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이라는 것은 ‘지성소’ 를 의미합니다. 지성소 안에 속죄소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장소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자리로 시은좌라고도 부릅니다.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1년에 1번 지정된 날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규례입니다. 만일 이 규례를 어기게 되면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것처럼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레위기 23장 27절 말씀에 따르면, 7월 10일이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이 날을 ‘대 속죄일’ 이라고 하는데, 이 날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헐고 하나님과 화평하는 축복된 날입니다.

 

성막의 구조와 성막에 관한 규례를 보면, 죄의 담을 헐고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규례를 어기고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성막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께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성소는 휘장과 법궤와 속죄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지성소의 휘장은 그 두께가 10㎝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힘센 말이나 소가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두께가 휘장의 두께입니다. 휘장의 두께는 인간의 죄의 장벽이 얼마나 두꺼운가를 보여 줍니다. 그 죄의 장벽으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평상시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던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위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다음에는 몸을 씻은 후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로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드릴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가야 합니다.

 

이 의식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먼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거룩한 옷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대 속죄일’ 을 집례하는 대제사장과 함께 함을 뜻합니다. 대제사장이 먼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한 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백성들의 죄를 위해 제사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규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16장 전체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론은 우선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를 해야 하는데, 속죄제로 수송아지를 잡습니다. 14절을 보면,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속죄소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의 자리, 곧 은혜의 자리입니다. 여기에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흔히 완전수로 쓰입니다. 이 순간만큼은 대제사장과 그 집안이 완전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죄사함 없이 속죄소 앞에 나아갔다가는 죽음을 당합니다. 즉 피를 일곱 번 뿌리지 않고 만일 여섯 번만 뿌리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죄사함은 다릅니다. 구약 율법에 따른 죄사함은 영원한 죄사함이 아닙니다. 다음 해 7월 10일이 되면 또 속죄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제사는 영원토록 죄를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이러한 속죄제사를 자기와 자기집안을 위해 드린 후, 백성을 위한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백성을 위한 속죄제사는 좀 특이합니다.

 

백성을 위해 제비 뽑은 두 염소 중 하나는 백성의 속죄제로, 또 다른 하나는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아사셀’ 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희생된 수송아지, 염소의 피로 지성소와 번제단을 정결케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두 염소를 통해 죄문제 해결에 두 가지 개념이 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속죄의 개념입니다. 속죄라는 것은 ‘죄를 없이 한다.’ 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죄의 전가입니다. 죄의 전가는 죄가 옮겨가는 것입니다. ‘아사셀’ 이라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죄의 전가를 받은 ‘아사셀’ 을 위한 염소는 그 죄의 짐을 지고 광야로 보내지게 됩니다. 염소가 혼자서 광야로 가게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그 염소에게 지운 죄의 짐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보낸다는 의미입니다.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과 그의 집안이 먼저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뜻합니다. [롬3:10] 또한 백성의 속죄제사에 앞서 대제사장이 먼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회개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서 가장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바쳐지는 제물을 보면 대제사장의 영적위치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4장을 보면, 제물에 대한 자세한 규례가 있습니다.

 

레위기 4장 3절을 보면,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짐승의 제사 중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이 흠 없는 수송아지입니다.

 

레위기 4장 13절과 14절을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죄가 아니라 공동체의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함께 인정할 수 있는 죄입니다. 이를 테면 ‘우상숭배죄’ 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말씀에 따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 드려지는 속죄제물은 수송아지입니다.

 

제사장 한 사람이 범죄하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드려야 하고,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하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그냥 수송아지보다 더 값이 나가는 것이 흠 없는 수송아지입니다.

 

이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한 사람의 범죄를 이스라엘 온 회중의 범죄 보다 무겁게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신앙공동체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잘못되면 가장 큰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고, 회사가 잘못되면 가장 큰 책임은 기업주입니다. 가정에서 가장 큰 책임은 가장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가장 큰 책임자는 담임목사입니다.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가장 무겁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다윗왕조 시대 때 다윗 한 사람의 범죄는 개인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나라 백성에게 까지 심각한 위기와 환난을 초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서 제사규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한 것 보다 제사장 한 사람이 범죄한 것을 더 무겁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큰 책임자의 자리로 올라 갈 때 마다 더 큰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향연이라는 것은 분향할 때 발생하는 연기인데, 이것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이 기도는 보통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중보사역자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속죄소를 가리는 향연(香煙)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막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및 사역을 말합니다. 율법시대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성막에서 중보자로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비뽑힌 두 염소는 인류를 위하여 친히 대속의 죽음을 맛보시고, 죄를 도말하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각각 예표합니다. 염소 중 하나는 잡아서 속죄제로 드립니다.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속죄제로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인류의 죄를 자기에게로 전가시킨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낮12시 부터 오후3시 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밝아야 할 대낮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말씀에 따르면 인류의 죄가 예수님에게로 모두 전가되었기 때문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인류의 죄가 예수님에게로 모두 전가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가장 추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자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인 태양이 3시간 동안 빛을 잃었습니다.

 

‘대 속죄일’ 은 매년 한번 드리는 제사입니다. 매년 반복되는 제사입니다. 죄의 전가를 받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현재의 죄까지는 짊어질 수 있었지만 미래의 죄까지는 짊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넉넉히 담당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감당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2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이 사실은 그리스도 속죄의 완전성과 영원성과 충만성을 뜻합니다. [히4:15, 벧전2:22, 요일3:5]

 

그리스도 속죄의 완전성이라는 것은 속죄의 범위가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라는 것입니다. 나의 어떤 죄는 사함 받았는데, 다른 죄는 사함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죄 문제는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죄문제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속죄의 영원성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단 한번에 영원토록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구약시대처럼 반복되는 제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속죄의 충만성이라는 것은 오히려 비싼 값을 지불하였다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속죄였으므로 하나님은 인류의 죄 값 이상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말씀합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아사셀을 위한 완전한 희생제물이십니다. 완전한 죄사함, 완전한 죄의 전가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나의 모든 죄는 돌아올 수 없는 땅, 광야로 이미 떠나보낸 상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는 죄사함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위한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뿐입니다. 이것은 구원적 의미의 회개입니다. 마치 나의 모든 죄의 전가를 받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광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됩니다. 성화는 영적으로 자란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성화를 위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과 비슷합니다. 죄로 인해 매일 더러워진 발을 씻지 않고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은 구원의 축복과 성화의 축복을 포함해 이 세상 삶에서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으며, 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지성소의 휘장은 두께가 무려 10cm가 되는 튼튼하고 질긴 것입니다. 이러한 지성소의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막15:38]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줍니다. 첫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찢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셋째는 구약의 율법시대에서는 7월10일 ‘대 속죄일’ 에만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왔는데, 이제는 어느 장소에서든지,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서 충만한 은혜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 휘장은 더 이상 두꺼운 휘장이 아니라 믿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는 휘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요14:6]

 

구약의 율법시대에는 규례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 규례는 너무나 복잡하고 힘든 것이며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 모든 규례를 폐하시고, 단 하나의 규례만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규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오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규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이 규례마저 폐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12절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레위기 말씀에 따라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는 율법의 말씀에 따라 죽으셨고, 그 율법을 이루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른 이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당해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당하심으로 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속량해 주셨다는 것은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