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0장, 야곱의 가족과 라헬의 마지막 포옹
창세기 30:1-24
사람이 느끼는 인생의 속도가 이렇다고 합니다. 20대는 20km, 40대는 40km, 60대는 60km의 속도로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80대나 90대에 임박한 어른들께서 느끼는 인생의 속도는 초고속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2011년 1달이 다 되어가고, 금주에는 설 연휴를 보내게 됩니다. 젊은이들에게 2011년은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1년이 될 수도 있겠고, 중년기에 이른 분들은 노년을 어떻게 준비할까에 대해 가끔씩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년기에 이른 분들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들이 슬라이더처럼 지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자연적인 자기 수명을 다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라헬이 산고로 인해 죽는 내용이 있습니다. 라헬은 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젊은 나이에 산고로 죽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이런 저런 이유로 얘기치 않은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연적인 자기 수명을 다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인생의 길이만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자연적인 자기 수명을 다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지 못했다고 해서 불행한 인생은 아닙니다. 그가 비록 행복한 세월을 보내면서 장수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한 인생이라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곱,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도망자 인생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빌붙어 살았습니다. 레아는 남편 야곱에게서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남편에게서 비록 사랑받았지만 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었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었습니다.
신학자 칼빈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어나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구별하신 것을 은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칼빈에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칼빈은 당신을 소나 돼지나 닭으로 짓지 않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칼빈에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묻자, 칼빈은 그것은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라고 했고,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구원받은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그 영적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우리의 신분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가 예쁘게 생겨서 사랑하는 것입니까? 하는 짓이 귀여워서 사랑하는 것입니까? 부모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못나도 사랑하고,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도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은 내가 창세전에 택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누군가 지금 사는 이유를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식 때문에 사는 것입니까? 가족 때문에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는 것이 재미있어서 사는 것입니까? 그냥 세상이 살만해서 사는 것입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보람되고 가치가 있어서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죽지 못해서 사는 것입니까? 내게 목표가 있어서 사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이유들은 영적인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이유에도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영적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구원받은 이유를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였다.’ 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은총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많은 위험이 있었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파란만장한 야곱의 일생에 은총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고생의 연속이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은총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은 형의 미움을 받아 일찍 타향살이를 했던 사람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망갔을 때 라반에게 이용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연애하던 라헬과 결혼하게 되지만, 그 전에 마음에 없던 레아와 먼저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집에서 긴 세월 일을 했습니다. 라반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 7일, 양떼를 위하여 6년을 일했습니다. 첫 7년은 라헬을 얻는다는 생각으로 세월가는 줄 몰랐지만, 나머지 13년은 일한다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더구나 외삼촌 라반은 품값을 10번이나 바꾸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다른 형제들의 시기로 아들 요셉을 잃게 됩니다. 요셉을 다시 찾기 전까지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막내 아들 베냐민을 얻을 때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어야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인생말년에 고향에 흉년이 들어 남의 나라 땅(애굽)으로 이주를 하여 다시 타향살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국땅에서 뼈를 묻으면서 그 파란만장한 야곱은 생을 마감합니다.
이처럼 야곱의 인생을 보면, 위험과 고생의 연속이었고, 죽는 날도 고향에서 죽지 못하고 외국에서 죽는 불운의 남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였다.’ 는 것은 단지 ‘야곱을 구원하였다.’ 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삶 속에 늘 사랑으로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살아생전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인생의 황혼기에 애굽에서 바로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보면,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회한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을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였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합니까? 야곱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창세기 29장 31절- 창세기 30장 24절 까지는 야곱이 자녀를 가지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자녀를 가지는 내용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야곱은 오직 사랑하는 라헬을 통해 자녀를 얻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삶이 늘 그렇듯이 자기 생각대로만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통해 2명의 자녀를 얻기까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인 레아를 통해 6명의 자녀를, 그리고 2명의 여종을 통해 4명의 자녀를 얻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야곱이 사랑하지 않는 레아의 태는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사랑하고 있는 라헬의 태는 닫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내가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할 때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 자신이 원치 않는 아내 레아로 부터 6명의 자녀를, 그리고 두 명의 여종을 통해 4명의 자녀를 먼저 얻게 하신 것이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야곱의 12지파를 형성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야곱은 12명의 자녀를 낳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라헬이 먼저 자녀를 가졌다면 야곱은 12명의 자녀를 낳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레아를 노골적으로 차별했고 결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레아와 여종을 통해 10명의 자녀를 먼저 낳아야 했습니다. 라헬이 먼저 아이를 낳았다면, 야곱이란 사람은 보기 싫은 레아를 통해 자녀를 가질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야곱은 원치 않았던 일이지만 이렇게 해서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야곱의 12지파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야곱의 12지파는 출애굽시 광야에서 만든 성막의 동,서,남,북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12제자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는 방법이었고, 은총의 방법이었습니다. 야곱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날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 관한 숨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라반과 같은 인생의 복병을 만납니다.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계획은 인생의 복병과 원치 않는 수많은 일들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나에게 가장 값진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도 나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아에게도 은총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6명의 자식을 얻었습니다. 더구나 레아는 4번째 아들을 낳으면서, 그동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한이 풀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찬송’ 이라는 뜻으로 ‘유다’ 라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낳으면서 마음에 쌓인 한도 풀고, 12지파 중 6지파의 조상을 낳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라헬에게도 은총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비록 자식 복이 없었지만 늦게나마 2명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낳게 되어 2지파 조상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라헬은 막내 아들을 낳고 산고로 죽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라헬의 죽음 자체는 슬픈 것입니다. 너무나 애절히 사랑했던 남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라헬은 언니와 갈등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언니의 많은 아들들이 자신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그다지 길지 못했습니다. 막내를 낳고 이제 죽게 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라헬은 갓난아이를 안고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라헬은 “베노니” 라고 불렀습니다. “베노니” 는 “슬픔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라헬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라헬은 자신의 두 번째 아들 베냐민에게 마지막 포옹을 하고 죽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라헬에게 허락하신 인생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베냐민과의 마지막 포옹은 동시에 하나님이 라헬에게 주신 은총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을 통해 정확히 12지파가 형성된 것은 라헬의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라헬이 죽지 않았다면 라헬은 자녀를 더 낳을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언니가 낳은 자녀는 무려 6명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헬의 죽음으로 야곱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고 정확히 12명에서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느끼고 알 수 있는 은총입니다. 레아가 4번째 아들을 낳고 그 한이 풀어진 것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은총을 원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은총을 원합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는 은총을 원합니다. 사실 이 은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내로서 노골적인 차별대우 받는 레아에게 자식 복 마저도 없었다면 누가 그 한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노골적으로 차별대우 받고 있는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노골적으로 자식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은총입니다. 라헬이 그러한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라헬이 막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포옹하면서 이름을 ‘슬픔의 아들’ 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그녀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혹은 슬픔이 컸던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이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레아와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라헬처럼 깨닫지 못하는 은총도 있습니다. 레아가 유다를 낳으면서 체험한 은총은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인생의 윤활유 같은 은총입니다. 한편 라헬이 깨닫지 못한 가운데 얻은 은총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총입니다.
이처럼 야곱과 레아와 라헬은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삶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순간순간이 은혜인 것입니다. 라헬이 막내 아들을 낳아, 마지막 포옹을 하면서, “슬픔의 아들” 이라고 이름을 짓던 그 순간도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32절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궁극적인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은총을 지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고 계십니다. 궁극적으로 주님은 우리의 삶과 죽음과 함께 하시며 영원한 은총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내가 일을 계획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일을 계획해도 영원한 계획 가운데 일을 이루어 나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쁨이 더 큽니다.
야곱의 경우,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 나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라헬을 얻기 전에 레아를 먼저 얻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라헬의 태를 닫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사랑하지 않는 레아의 태를 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라헬을 데려 가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단지 장자권을 빼앗으려 했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려 했으며, 사랑하는 여자를 얻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를 가지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계획한 전부였습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통해 12지파를 형성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어 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할 때, 나의 인생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의미있는 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야곱에게 의미있는 것은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과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러한 집념이 하나님에게도 의미가 있었던 것은 12지파를 형성하여 이스라엘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기도라는 것은 내가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라는 것은 나의 삶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의 삶이 의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은총이라는 것은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이 발견되고, 하나님 안에서 나의 삶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루를 참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인도의 손길에 감사해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한을 풀어주시는 은총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내게 삶의 어려움으로 다가오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끝나지 않고, 궁극적인 은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