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장, 안식일
출애굽기 20장 8절-11절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안식일의 기원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우리는 안식일의 기원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의 역사를 다 마치신 날입니다. ‘일’ 이라는 것은 시작이 있으면, 마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의 역사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마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시는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우주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늘의 별들을 운행시키십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인생들을 당신의 뜻과 섭리로 주관하십니다. 심지어 날아다니는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떨어집니다. (마10:29, 눅12:6)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이 모든 일을 마치시는 날이 있습니다. 지금의 하늘을 더 이상 운행시키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일을 마치는 날이 있습니다. 인생들을 당신의 뜻과 섭리로 주관하시는 일을 마치는 날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시는 날이 있습니다.
안식(安息)이라는 것은 그 일을 다 마친 후, 편히 쉬는 시간입니다. 6일 동안의 창조의 역사를 하시고, 일곱 째 날 마치고 편히 쉬는 시간이 안식일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 제 4 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듯이,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6일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고 일곱째 날은 편히 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반복되는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면 또 다시 6일 동안 힘써 일을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또 다시 6일 동안 힘써 일을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모든 일을 마치시고 편히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은 영원한 안식의 시간입니다. 영원한 안식일입니다. 영원한 안식일은 6일 동안 힘써 일을 하고, 편히 쉬는, 반복되는 안식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모든 일을 마치시고 영원토록 쉬는, 영원한 안식일입니다.
영원한 안식일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면서 시작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만 드립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찬양과 경배, 하나님으로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한 안식일에, 구원 받은 백성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구원 받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영원한 안식’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일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6일 동안 힘써 일을 하고,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안식일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단순한 진리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고된 일을 마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생업도 마치는 시간이 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의무를 다 내려놓는 시간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짐을 다 내려놓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삶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모두 끝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이 있음을 소망하면서 매주 안식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통해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충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충전해야 합니다. 그 힘을 충전하는 시간이 안식일입니다.
신약시대 이후에,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일을 맞이하면서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충전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소망하면서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충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라는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이 남아있습니까? 아니면 주일 예배가 한 주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되고 있습니까? 주일 예배가 한 주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 예배가 한 주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되려면 어떤 예배가 되어야 합니까?
•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 찬양의 감동과 기도의 감동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복되다.’ 는 것은 원어로 ‘바라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릎을 꿇다.’ ‘하나님을 송축하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사람을 은혜로 복주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되다’ 는 말은,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송축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면서 피조물로서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진정 내 영혼의 만족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그 영혼이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 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어 작별인사에서 굿바이는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God be with ye)뜻의 준말입니다. ‘스페인’ 에서 아디오스(adios) 라는 말은 "하나님께 향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축복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평화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사실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통해서, 거룩한 주일을 통해서 만나야 할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한 주 동안 세상에서 우리를 평화의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고자 안간(안깐) 힘을 씁니다. 그래서 시험을 받기도 하고, 불신에 빠지기고 합니다. 그러나 주일에는 모든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비록 시험에 빠졌지만, 비록 불신에 빠졌지만, 평화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주일에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한 주를 살아야 합니다.
‘바라크’ 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다’ 는 뜻도 있지만, ‘저주하다’ 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것 자체가 저주요,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과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세상 오락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되게 한 일곱째 날을 어떻게 보내는 사람인가를 보면, 그가 복 받은 자인가? 저주 받은 자인가? 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은 다른 날 보다, 그 날은 특별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힘써 일하는 6일 동안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주일에는 더욱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더욱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저주 받은 사람은 6일 동안 틈나는 대로, 세상 오락을 즐기다가, 쉬는 날이 오면, 더더욱 세상 오락을 즐기며 자기를 즐겁게 하는 시간으로 가득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주일을 지키면,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선심 쓰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복되게 하고, 자기 영혼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 때문에 참석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일은 내 영혼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선물을 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하게 하셨다’ 는 것은 원어로 ‘카다쉬’라고 합니다. ‘성결하게 하다’ ‘성결하다고 선언하다’ ‘구별하여 바치다’ ‘봉헌하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일에 더욱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더욱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결하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은 특별히 우리의 시간을 구별하여서 드려야 하고, 우리 몸과 마음을 구별하여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물을 구별하여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일곱 째 날 자체가 거룩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한 날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일곱 째 날 자체가 거룩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미신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일곱 째 날을 거룩한 날이라고 선포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운이 좋거나 복되고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길일(’吉日) 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그런 날이 있다고 생각하여, 개업하기 좋다는 ‘길일’ 에 맞추어 개업을 하고, 결혼하기 좋다는 ‘길일’ 에 맞추어 결혼을 합니다. 그렇지만, ‘길일’ 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원래부터 좋은 날은 없습니다. 원래부터 거룩한 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을 어떤 날로 선포하시는가? 에 그 날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길일’ 을 세상종말의 날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은 결코 ‘길일’ 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째 날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째 날을 거룩한 날이라고 간주하시고, 선포하셔서 거룩한 날이 된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간주하셔서 거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와 허물은 심판 받아 마땅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간주해 주셨기에 심판을 피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이 날을 생각하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새겨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이 안식일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9절과 10절 말씀을 보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선 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해야 합니다. 안식일도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일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의 일생 동안, 다섯 사람이 이룰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혼자서 해냈다고 합니다. 그는 72세에, 그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내가 30년 전에 지녔던 것과 똑같은 힘을 지금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분의 일을 해 온 데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분의 일을 하고 싶어서, 거의 50년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대체로 5시경부터는 설교하기 시작했고, 육로나 해로를 통해 매년 4, 500마일 이상을 여행했던 것이 건강을 지키는 데 주효했던 것 같다."
는 글을 요한 웨슬리는 일기에 남겼습니다.
목회만 성직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 성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 때, 지금의 일을 더욱 풍성히 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직업에 불과합니다. 먹고 살기 위한 밥벌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직업이나 사업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한다면, 그것은 성직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한다면, 그 일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성직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을 아무 생각 없이 감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면, 감당하는 그 일로 인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감당하다가 받는 칭찬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6일 동안 하나님 앞에서 일을 감당하다가, 일곱 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는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마8:14; 막2:5; 눅14:1-16; 요5:5-18)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마12:1-8)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는 것은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는 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는 것은 안식일에 세속적인 일을 쉬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세속적인 일을 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올바른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 동남부 클론다이크라는 곳은 유명한 금광지역입니다. 그 지역에 있는 한 토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유서가 발견됐습니다.
“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이제 식량은 떨어졌다. 우리는 금덩이를 옆에 놓고 눈 속에 갇혀서 죽어가고 있다. 그들은 굴속에서 자고 먹으며, 정신없이 금을 캤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겨울의 한복판에 와 있었다. 평생을 쓰고도 남을 금덩이가 캤지만, 결국 그 금덩이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가끔 굴밖에 나와 바람이라도 쐬었더라면, 이런 죽음은 면했을 것이다.” 는 내용의 유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속을 멈추고 심호흡이라도 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영적으로 심호흡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생의 속도는 어떤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못되었다면 고쳐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면,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너무 지나친 속도를 내며 살고 있다면 그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생의 속도를 줄이기도 하고,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다시 올바른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넷째는 안식일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사야 58장 14절을 보면, 안식일을 지킬 때 축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야곱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최소한의 신앙표현입니다. 그가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 가늠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입니다.
그가 참으로 주일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지키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나라 기업이 있습니다. 그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최소한 지켜야 할 영적 의무에 속합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성도들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가?’ ‘세상에 있는가?’ 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 스타일을 정해 놓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설사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마음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는 것은 영적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주일예배는 드리고 싶다고 드리고, 드리기 싫다고 안 드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가 좋으면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가 좋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영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물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해서, 한 주 전체를 거룩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한 주를 하나님 앞에서 시작하는 첫 단추가 됩니다. 주일에 큰 은혜 받았다고 해서, 한 주 전체를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에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한 주간 동안 하나님 은혜를 사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처럼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최종적인 안식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지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