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요한복음

요한복음 1장,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영구한도성 2022. 7. 21. 05:4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 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太初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生命이 있었으니 이 生命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證言하러 왔으니 곧 빛에 對하여 證言하고 모든 사람이 自己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對하여 證言하러 온 者라
9 참 빛 곧 世上에 와서 各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世上에 계셨으며 世上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世上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自己 땅에 오매 自己 百姓이 迎接하지 아니하였으나
12 迎接하는 者 곧 그 이름을 믿는 者들에게는 하나님의 子女가 되는 權勢를 주셨으니
13 이는 血統으로나 肉情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者들이니라
14 말씀이 肉身이 되어 우리 가운데 居하시매 우리가 그의 榮光을 보니 아버지의 獨生子의 榮光이요 恩惠와 眞理가 充滿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對하여 證言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前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充滿한 데서 받으니 恩惠 위에 恩惠러라
17 律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恩惠와 眞理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本來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獨生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과 성육신에 대한 증언입니다. ‘태초’ 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고, 성육신의 사건을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표현합니다.

‘거하시매’ (KJV, NASB) 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장막에 거하시매’ 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장막에 거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 분의 백성 안에 장막을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분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우리’ 라는 것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이나 무리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 는 그를 믿는 모든 자들입니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그 분의 백성 안에서 장막을 치십니다. (요일4:2) 그래서 성령께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게 하시고, 지금도 그 분의 백성 안에서 성령을 통해 장막을 치고 계십니다.

1절에 ‘태초’ 라는 것은 창세 이전을 말합니다. ‘시간’ 이 존재하기 전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생명과 빛을 주시는 ‘말씀’ 이며, 그는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세계를 유지하시는 능력이십니다.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는 것은, ‘말씀’이 모든 피조세계가 존재하게 된 근원이 되고, ‘말씀’ 이 만물의 영원한 계획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우주가 생성되어 어떤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국가와 민족의 역사 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사가 어떤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 ‘말씀’ 이 그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무언가 구상하고, 설계하고, 무언가를 목표로 삼고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개개인의 인생을 붙들고, 지탱하고,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끊임없이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다.’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는 것을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지탱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분이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세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화가가 화폭(畫幅)에 그림을 그려 완성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화가가 자기가 그려 놓은 화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창조한 피조세계로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육신의 사건은 신비 중에서도 신비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일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거룩하시어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항상 징계하시며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징계하시며 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도 모자라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갑자기 바뀐 것입니까? 성육신 하시면서 하나님의 본성이 바뀌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이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17절을 보면,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죄에 대해 분노하시고, 그러시면서 사랑이십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어제나 오늘이나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죄에 대해 분노하시고, 그러시면서 사랑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을 때나 광야생활 속에서나 약속의 땅에 정착해서나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시로 변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었습니다.

온갖 죄를 다 지으면서도 현재까지 별 일을 겪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없다 합니다. 구약 시대 때는 공의의 하나님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나 신약시대 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믿다가도 힘든 일이 닥치면 그 사랑을 불신하고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러시나?’ 반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바뀌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님과 같았고, 현재도 그러하시며 미래에도 그러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평안과 사랑의 주님이시고,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과 공의의 주님이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율법과 공의의 주님이시면서, 평안과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평안과 사랑의 주님이시면서 율법과 공의의 주님이십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할 죄의 짐을 대신 당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이면서 율법과 공의의 십자가입니다.

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시면서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는 독생하신 하나님을 통해 알게 됩니다.

독생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통해 장막을 치며 거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예수님은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을 나타내는 단어가 헬라어에 3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뜻하는 ‘비오스’ 가 있고, 정신적인 생명을 뜻하는 ‘푸시케’ 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 근원적인 생명을 뜻하는 ‘조에’ 가 있습니다. 4절에서 말하는 생명은 ‘조에’입니다.

육신의 생명이나 정신적인 생명이나 모두 근원적인 생명인 ‘조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근원적인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면 육신의 생명도 끝나고 정신적인 생명도 끝납니다.

그래서 ‘조에’ 즉, 영원한 생명, 근원적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조에’ 즉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연결될 때,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육체의 생명과 정신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있게 한 근원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화론과 자연발생설이 나옵니다.

이 우주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는 것은 생명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포하고 있고,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근원적인 생명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5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 못하더라’ 는 것은 영어성경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다’ (NIV) 혹은 ‘극복하지 못하다.’ (NRSV)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에 속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깨닫지 못하면 구원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과정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죄로 인해 극복하지 못하지만 은혜로 인해 극복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빛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해 서안(西岸)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한 구약성서인 사해사본에 따르면, 이 부분에 대해서 점진적인 과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의 세력이 사투를 벌이지만 빛이 승리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까지 빛과 어둠의 세력 간에 사투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을 당신의 나라에 완전히 안착시킬 때 까지 빛과 어둠의 세력 간에 사투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빛이 승리합니다. 말씀이 승리합니다. 주님이 승리합니다. 이렇게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예정이 소망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예정이 저주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완전히 안착(安着)하기로 예정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어떤 권세가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로 오신 것은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그리고 신비 중에 신비 인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화가가 화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신비인 것처럼, 화폭의 그림이 화가에게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도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그 분에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1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3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혈통은 헬라어로 ‘아히마토스’ 인데, 피를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 혈통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육은 헬라어로 ‘살코스’ 인데, 혈육을 가진 인간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입니다.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뜻’ 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델메마토스 안드로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의지를 말합니다. 즉 인간의 주권적인 의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원하다.’ 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부터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기서 ‘난’ 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에겐네데산’ 이라고 하는데, 헬라어 문법에서는 부정과거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부정과거라는 것은 동작의 지속기간과 관련 없이 완성된 동작을 진술할 때 사용합니다. 이것을 현재 시제와 비교하면 현재시제는 계속 움직이는 활동사진과 같은 것인데, 부정과거는 한 번 찰칵 찍으면 그대로 유지되는 스냅사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태에서 그것이 영원토록 유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하나님의 자녀였고,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미래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한 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보게 하는 거울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4장20절을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말씀합니다.

부부는 무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가깝습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동거하고 있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공유할 수는 있어도 남편이 아내 안에 있고, 아내가 남편 안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계시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삶의 주권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14절 하반절을 보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합니다.

‘은혜’ (카리토스) 는 선물을 말합니다. 은혜의 영광은 그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와 선물을 거저 줌으로써 받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영광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은혜와 그 분에게서 비롯되는 하늘나라 선물을 거저 주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영광으로 충만하시기에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하십니다.

‘진리’ (알레데시아) 는 거짓의 반대인데, 참되고 진실함을 말합니다. 솔로몬의 영광이 꽃과 같이 시드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영원히 시들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시들지 않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생자의 영광에 머물고 세상의 헛된 영광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주님의 은혜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삶의 현실에서 펑펑 솟아오르는 오아시스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주님의 진리는 세상의 온갖 거짓과 위협의 세력 앞에 굴하지 않도록 담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육신 하신 주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즉 성만찬입니다.

우리가 매달 드리는 성만찬은 하나의 예식이기 전에 거룩한 영적 교제입니다. 그리고 성만찬은 우리 삶 속에서 항상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충만하신 주님의 은혜와 진리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성만찬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을 주시고 피를 주신 것을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만찬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사건 앞에서도 불평, 불만을 터뜨리기보다 그것을 십자가 앞에서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만찬은 회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 우선 자기 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해 고난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의 피를 주시고 생명의 살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성만찬의 은혜가 깊어질수록 성육신 하신 주님의 은혜와 진리를 크게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