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잠언

잠언 3장, 하나님을 의뢰하라

영구한도성 2022. 7. 21. 21:02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信賴하고 네 明哲을 依支하지 말라
6 너는 凡事에 그를 認定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指導하시리라
7 스스로 智慧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敬畏하며 惡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良藥이 되어 네 骨髓를 潤澤하게 하리라

 


 

우리는 잠언서의 저자를 솔로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장1절에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 이라고 본서가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언서의 내용들을 보면 본서가 여러 사람에 의해 쓰여 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굴의 잠언과 르무엘왕 어머니의 잠언도 있습니다. 아들에게 일러주는 잠언들, ‘지혜’ 라는 단어를 인격화하여 일러주는 잠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한 사람이 썼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전체적인 잠언이 정리가 된 것은 바벨론포로 귀환 후인 기원전 4세기에서 5세기 경이라고 보고 있으며, 솔로몬의 잠언은 기원전 1세기 경 쓰여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서 내용은 가장 빠른 것에서 가장 늦은 것 까지 약400년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합니다.

 

잠언서 뿐만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그렇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다양하며, 그 기록연대가 다릅니다. 창세기 기록연대는 기원전 1500년 경으로 추정하고, 신약성경 중 기록연대가 가장 늦다고 볼 수 있는 요한일서, 이서, 삼서는 기원후 90년에서 95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전체는 그 기록연대가 가장 빠른 것에서 가장 늦은 것 까지 1600년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합니다.

 

구약성경이 정경으로 지금의 39권(원전에서는 24권)으로 정해진 것은 90년경의 얌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지금의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였습니다.

 

정경이란 뜻은 ‘성령(聖靈)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경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시대, 다른 사람이 기록하면서도 그 내용이 같아야 정경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기록했다고 해도 정경이 될 수 없고, 내용이 달라도 정경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록한 시대적 격차가 짧아도 정경으로서의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정경이 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사람, 긴 시간적 간격 속에 기록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한 분 하나님, 한 분 메시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정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5절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라.’ 말씀하고, 6절에서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말씀하고, 7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신뢰하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라.’ 는 것은 신학적인 권고가 아닙니다.

 

책상 머리 맡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인 분석의 결과 그 분은 신뢰할만하고, 경외할만하며, 인정할만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권고는 여러 세대에 걸친 실제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이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듯이 본문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도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22편 4절과 5절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노래합니다.

 

여기서 우리 조상은 한 시대의 조상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조상을 말합니다. 곧 출애굽과 광야를 지나는 길고 위험한 때, 가나안 땅 정복시대, 위대한 사사들의 시대,왕국시대 모두를 포괄합니다.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자기 백성을 저버리지 않은 때를 기억하면서, 시인은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어 바다를 육지같이 걷게 하신 하나님, 광야를 지나는 길고 위험한 때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만나를 먹이신 하나님, 가나안 땅에서 이방세력으로 부터 고통당할 때 마다 사사를 보내시어 구원하신 하나님, 왕국시대에 외적의 침입을 물리쳐 주시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 번영을 이루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지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상들이 주께 의뢰할 때 마다 건지신 하나님에 대한 역사를 기억하며, ‘여호와를 신뢰하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라.’ 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적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하나님을 떠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마다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지혜자는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여호와를 신뢰하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라.’ 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를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를 인정하며 경외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첫째,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라는 말씀은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의뢰하고’ 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trust' 로 되어 있는데, 'trust'가 ‘신뢰하다’ 는 뜻 외에 ‘위탁하다’ ‘기대하다’ ‘의지하다.’ 는 뜻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여호와를 신뢰하고’ 는 말씀은 ‘여호와를 의뢰하고’ 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의뢰한다.’ 는 말 속에서 ‘신뢰한다’ ‘기대한다’ ‘의지한다.’ 는 뜻이 함께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는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데, 특히 시편[시4:5, 37:3-5, 62:8]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는 말씀들을 살펴보면,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소급하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15편 9절에서 11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만이 도움이시요 방패라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모든 자들이란 세상과 구별된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도움이거나 방패가 되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의 도움이 되고 방패가 되시는 것입니다.

 

의뢰한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의뢰하다’ 는 히브리어 동사를 잠언서에서 살펴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1장 33절을 보면,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이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말씀하고, 3장 23절을 보면,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장 26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말씀합니다.

 

과거 90년 대 까지 택시에 많이 걸려 있던 사진이 있는데, ‘오늘도 무사히’ 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 아주 어린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이 ‘사무엘’ 이라는 말도 있는데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위험한 세상 속에서 ‘오늘도 무사히’ 보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의뢰하다.’ 는 히브리어 동사를 이해하려면 ‘오늘도 무사히’ 보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 의뢰한다는 것은 이 세상 삶이 순간순간 위험하고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지만, 그 순간순간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설사 인생의 어떤 문제와 곤경이 생긴다 해도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도움이 나를 지킨다는 확신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전혀 근심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지향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본문의 지혜자가 이스라엘의 긴 역사 가운데서 믿고 있는 것은 자신이나 사람을 의지할 때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의뢰할 때 그 안전이 보장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삶’ 이 무엇인가? 할 때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삶’ 은 한 마디로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인정한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22장32절을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말씀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제가 아는 사람의 자가용 타이어가 펑크가 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동적으로 펑크가 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펑크를 낸 것입니다. 상황을 살펴보니 그 자가용이 주차선을 무시하고 어정쩡하게 주차를 해 놓아서 어떤 사람이 화가 나서 펑크를 낸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단순한 사건 속에서도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행동양식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화가 나서 타이어 펑크를 내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는 사람은 화가 나도 여호와를 인정하기 때문에 자가용 펑크를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꽃같은 눈동자를 통해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창세기 5장24절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모든 시간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면 그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네 길을 지도하신다.’ 는 것입니다. 지도한다는 것은 이끌어준다는 의미와 어디로 가야할 지 가르쳐 준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이자 나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 인생 전체를 한 눈에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내 인생에 무엇이 유익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사람이 가장 축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도하시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셋째,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말씀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지도 않을 뿐더러 악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연약하여 어쩔 수 없이 죄에 빠지는 것과 그 죄 자체를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며, 경외하면 몸에 양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삶이 육체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사람은 영적존재이자 육적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부분과 육적인 부분은 상호성을 가지고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몸과 정신이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건강한 영혼에 건강한 몸’ 입니다. 건강한 영혼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며,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건강한 몸이 따라옵니다.

 

물론 온전한 신앙의 삶이 건강한 몸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에게도 사단의 가시가 있었고, 디모데는 몸이 약해서 늘 고생이었고, 기독교 역사에서 영성이 깊은 사람들 중에 몸이 약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건강이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과 건강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를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며, 경외하는 삶이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불면증 환자가 많습니다. 불면증 환자가 고침 받으려면 여호와를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 부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처럼 여호와를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그것이 양약이 되어 골수가 윤택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며, 경외하라는 신앙의 명제를 긴 역사 속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1600년간에 걸쳐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은 역사가 증명해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느 날 갑자가 혜성과 같이 나타난 미혹의 세력에 영향을 받지 말고, 긴 역사 속에서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의뢰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