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23절을 보면, 세례요한을 가리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출생하였습니다. 이사야서 기록연대는 기원전 739년에서 680년 정도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과 세례요한의 출생 사이에는 약 700년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합니다.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는 장차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외치는 자의 소리’ 라고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사40:3)
세례요한이 ‘외치는 자의 소리’ 로서 감당했던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의 길’ 이라 말씀하고,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고 예언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의 길’ 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걸어가실 길, 곧 주님께서 일생을 사시면서 하실 일입니다. ‘여호와의 길’ 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길입니다. ‘하나님의 대로’ 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실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걸어가실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길이며, 이 길은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 걸어가실 길입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 은 주님께서 걸어가실 수 있도록 평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평탄하게 만드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평탄하게 만들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세례요한의 사명입니다.
요한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광야에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막1:4, 눅3:3) 백성들은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5절을 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세례요한의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이사야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소리’ 라고 말했고, 선지자 이사야도 ‘외치는 자의 소리’ 로 예언하였습니다. ‘소리’ 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외친 후,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소리’ 였기 때문에 ‘외치는 자의 소리’ 로서 살다가, 헤롯왕에게 목이 베이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가 외쳤던 소리가 무엇입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외쳤던 소리가 무엇입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는 소리였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길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고 외쳤고, “이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고 외쳤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오늘날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0장 15절을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말씀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동시에 전도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사명은 세례요한의 사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좋은 소식,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전도자들은 이 시대의 세례요한입니다.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전파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소리가 사라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발걸음이 사라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소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소리쳐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음악소리, 물건을 파는 시장 상인들의 소리, TV에서 앵커(anchor)가 사건, 사고 소식을 전하는 소리, 선거철만 되는 한 표 부탁한다고 외치는 정치인들의 소리, ‘이렇게 살아야 한다’ 고 강의하는 윤리학자들의 소리, 그리고 ‘진리가 무엇인가?’ 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철학자들의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어떤 소리든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무엇보다 세례요한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메시지를 전파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왜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5장22절을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 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렘브란트 이전까지는, 수많은 화가들이 아담과 하와를 아름답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몸매를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주 볼품없는 몸으로 그렸습니다.
렘브란트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순간 ‘하나님의 형상’ 으로 지어진 그들이 ‘끔찍하게 기형적인 형상’ 으로 바뀌어 졌다는 사실입니다.
범죄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사라졌습니다. 영혼의 가장자리에는 불신앙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일그러지고 깨어지고 뭉그러져 버렸습니다. 병들었고, 어느 부분도 죄의 오염으로 손상되지 않은 부분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칼빈은 범죄한 인간의 실상에 대해,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모든 인간의 기능들이 너무나도 망가졌고 부패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동 속에는 끊임없는 무질서와 격정이 위험스럽게 도사리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18절에서 32절을 보면, 인간본성의 부패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 우상을 숭배, 정욕과 동성연애,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상실한 마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하는 말, 비방, 능욕, 부모를 거역함, 우매함, 배약함, 무정하고 무자비함이 부패한 본성의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부패한 마음들이 심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진짜 죽음은 단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진짜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얼굴은 하나님으로 부터 떠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며, 아담의 얼굴은 사망권세로 짓눌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행한 사건들의 한결같은 원인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모든 문제의 시작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데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이렇게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범죄자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로 하여금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린 양으로 삼으셔서 속죄제물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에서 ‘하나님의’ 란 뜻에는 하나님의 것, 또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란 뜻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 양이시며, 하나님께 속한 어린 양입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라는 사람은 십자가 사건에서 대해서 “과연 누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했을까?” 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질문을 하니 몇 몇 사람이 답변했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한 사람은 ‘군인들’ 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빌라도’ 라고 말했고, 다른 한 사람은 ‘가룟유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묻는다면, 어쩌면 깊이 생각한 끝에 “저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고 답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존 파이퍼’ 라는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말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한 사람은 바로 자기 아버지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 답변으로 인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숙연(肅然)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한 후,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에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이 지나가기를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아버지는 외아들을 끝끝내 희생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23절에는,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내어 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세례요한을 통해 외치게 했던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고 외치게 했습니다. 이 외침은 세례요한의 외침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는 것은 하나님의 외침입니다. “내가 직접 준비한 나의 어린 양을 너희에게 보냈다.” 는 하나님의 외침입니다.
죄의 유혹 속에 있을 때,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 신앙이 흔들릴 때,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단은 세상의 이런 저런 소리는 다 듣게 해도,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과 4절을 보면,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 경고하고 있습니다.
귀가 가렵다는 것은 귀 자체가 죄의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귀 자체가 죄의 유혹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소리에 귀가 쫑긋해집니다. 물론 음악소리를 듣는 것도 좋고, 영화소리를 듣는 것도 좋습니다. 내 인생에 보탬이 되는 여러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인의 음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My Master's Voice) 개 49마리가 훈련을 받고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는 시험을 쳤다고 합니다. 49마리의 개와 49명의 주인들이 떠들어대는 그 소음 속에서 훈련이 잘 된 개는 주인의 음성을 곧 식별하고 주인의 명령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개들은 계속 두리번거리고, 다른 개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따라만 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와 잡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소리와 잡음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 말씀, “주인의 음성” 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를 십자가 현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7절을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의지할 데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사랑을 예수님에게서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오병이어의 기적현장에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맹인으로 평생 고생하다가 눈을 뜬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간음하다 들켜 사람들에게 맞아죽기 직전에 목숨을 구한 여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곱 귀신에게 시달리며 고생하다가 구원받은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를 때, 그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그 사람들처럼 따라야 합니다.
오병이어 기적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맹인으로 평생 고생하다가 눈을 뜬 사람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간음하다가 들켜 사람들에게 맞아 죽기 직전에 구원받은 여인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역시 수치스러운 죄로 인해 돌아 맞아 죽어야 당연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일곱 귀신에 시달리며 고생하다가 구원받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둠의 권세 속에 지내며 늘 우울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서 늘 우리 심령을 비추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기억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은 항상 귀로는 무언가를 듣게 되고, 눈으로는 무언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눈으로는 나의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음성을,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새롭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롭게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백성들은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일터에서, 학교에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이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과 같은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