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장, 생수의 강
1절에서 말씀하는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 매일 아침에 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을 붓는 행사입니다. 제사장이 실로암 못에 가서 금항아리에 물을 채웁니다. 제사장은 그 물을 들고 ‘수문’(the Water Gate) 이라는 곳을 통과합니다. 그 때 백성들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의 내용이 이사야 12장3절입니다. 이사야 12장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 말씀이 백성들이 불렀던 찬송의 내용입니다.
초막절에 불렀던 이 찬송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사막을 지날 때 일입니다. 그들은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은 온 땅을 태울 듯했습니다. 백성들은 목이 타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큰 바위 하나를 가리키시며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쳤습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바위에서 철철 넘쳐 흐르는 물을 모든 목마른 사람들이 마음껏 마셨습니다. 갈증에 목말라 죽어가던 그들이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생수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을 기념하면서 초막절 축제에 참석하였습니다.
초막절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서는, 7월15일을 초막절로 하고 7일 동안 지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제정된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백성들이 이사야 12장3절의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찬송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외쳤습니다.
백성들이 찬송하는 구원의 물은 무엇입니까?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을 해결한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게로 와서 마시라.’ 는 물은 무엇입니까? 영생의 물입니다.
백성들이 찬송하는 물은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린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죄에서 멸망 받을 백성을 살리는 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피와 물을 쏟으셨습니다. [요19:34]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을 걷고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100m 달리기 선수는 11초 뒤에는 결승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압니다. 마라톤 선수는 42.195km를 뛰면 결승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 약속의 땅에 도착할 것인가에 대해서 모릅니다. 사막을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사막에서 목마름으로 죽을 지경이라도, 내일 모레면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면 모세를 원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힘든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게 되면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이런 저런 생각이 하염없이 스쳐지나간다고 합니다. “내 아이가 힘든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질병에 걸리지 않을까?” “큰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차라리 낳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우울증은 산모가 아이를 낳거나 중년의 여성이나 노인만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우울증이 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울증이 있습니다.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산모가 아이를 낳았을 때 가지는 그런 우울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를 보게 되고,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만사 제쳐 놓고서라도 낚시하러 떠납니다. 노래방에서 고함을 질러야 하는 사람은 노래방으로 갑니다. 몸을 흔들어야 되는 사람은 나이트클럽으로 갑니다. 열심히 여자만을 쫓아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야구에 미치는 사람도 있고, 축구에 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젊은이들이 인터넷에 미칩니다. 연세 드신 분 중에 돈도 있고 건강하신 분은 여행을 즐깁니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이 나름대로 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사막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미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스트레스 풀 길도 없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멍청해 집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낚시를 떠나고, 노래방에서 고함을 지르고, 나이트클럽에서 몸을 흔들어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시 목마르게 하는 세상의 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이스라엘 백성이 오는 길에 자그마한 오아시스라도 발견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일단 모세를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위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은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위에서 물을 쏟게 하는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오는 길에 오아시스를 전혀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물이 오아시스 같은 것입니다. 내가 즐길 수 있는 물이 풍부하면 사람에 대한 원망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바위에서 샘물을 내시는 하나님은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여자는 모든 것에서 완벽한 남자를 남편으로 얻기를 원합니다. 잘 생겼고, 재산도 있고, 돈도 잘 벌고, 아내 위할 줄 알고, 밖에서는 카리스마가 있지만 집에서는 아주 가정적인 그런 남편을 원합니다. 제 친구 중에 아직 장가가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은 못생긴 편인데, 철도직 공무원으로 있기 때문에 직장은 안정된 편입니다. 지금까지 선을 볼 때 마다 그 결과 보고를 저에게 합니다. 그 친구의 얘기가 이렇습니다. 안정된 직장하나만 보고 시집 올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재산도 없이 안정된 직장만으로는 불안하다면서 모두 거절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벽한 남편을 배우자로 주지 않습니다. 완벽한 남편을 배우자로 주었을 때, 그 남편이 아내에게는 너무나 큰 오아시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의 영원한 오아시스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푹 빠져 살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남편이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현재 나의 삶 속에 느끼고 있는 부족함들, 갈증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나의 삶이 모두 만족스럽고 풍요롭다면 하나님이 거할 처소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신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이 있는 사람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공허함이 있는 사람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타는 듯한 갈증이 있는 사람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고 예수님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서울에 ‘88도로’ 라는 것이 있습니다. 88도로는 한강을 끼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넓은 한강의 그 엄청난 양의 물이 유유하게 흐르는 것이 보입니다. ‘생수의 강’ 이라고 할 때는 생수가 마치 한강 물처럼 풍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비가 없어서 가문 날에도, 변함없이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과 시원함, 활력과 평화의 생수를 풍부하게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시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 부터 탈출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탈출하여 홍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들 뒤에는 이집트의 전차 기병대들이 추격해 오고 있었고 앞은 홍해로 가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독안에 든 쥐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불신 가운데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확신과 평화가운데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행하시는 일을 보십시요. 여러분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어 홍해를 갈랐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는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 잊지 못하는 일은 이처럼 절대절명의 순간에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세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이라는 것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나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이 마셔야 할 생수는 바로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모든 사람이 받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레미야는 믿음의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렘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반면 그렇지 않은 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렘17: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믿음의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는 사람이라고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뿌리가 강변에 뻗친다는 것은 뿌리가 기나긴 강변 속에서 끊임없이 자란다는 의미입니다. 그 길이를 알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길이를 알 수 없는 이 뿌리가 의미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감추어진 영원한 샘과 같은 존재이며, 하나님께 의뢰하는 믿음의 심령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물을 끊임없이 공급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물을, 계시록 4장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물은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의 물이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절히 매달리는 영혼은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처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믿음의 사람을 이 세상이 넘어뜨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거대해도 믿음의 사람보다는 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도 항상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만 두고 싶은 인생의 일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인생의 매듭이 언제 풀리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초조해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기다릴 줄 압니다. 동시에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타는 목마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타는 목마름이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명과 기쁨, 평화와 안식이 강같이 끊임없이 흐르게 하십니다. 바람은 강물의 표면에 파도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 강물의 흐름을 막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는 도도한 강물처럼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 나아와 유유히 흐르는 생수의 강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