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장, 하나님의 소통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소통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는 다른 어떤 피조물 보다 특별한 소통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소통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시고 직접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소통방식을 계속 발전시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서 가장 극적인 방식은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모습 자체가 하나님과의 소통방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청년의 모습으로 혜성과 같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과 똑 같은 방식으로 보내셨습니다. 다른 사람과 똑 같이 육신의 어머니의 몸속에서 10개월을 지내는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요셉의 가정에서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보호받고 양육 받으시는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에게 자신의 아들, 곧 창조주이신 신(神)의 아들을 온전히 맡기는 방식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손에 신을 맡기셨고, 인간이 신을 보호하고 양육하도록 하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방식이 아닙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믿고 신뢰하고 자신의 아들을 통째로 맡기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역시 어머니의 젖을 얻어먹으려면 울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얻어먹기 위해 갓난아기로서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영아 사망률이 절반이 넘는 그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요셉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처럼 마리아와 요셉의 보호에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모습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나타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하나님께서 계신 성막에서 24시간 목숨을 걸고 경비를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막에서 왜 24시간 목숨을 걸고 경비를 서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성막을 지키실 수 있으신데, 다시 말해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실 수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막을 지키도록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소통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스스로 성막을 지키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통째로 맡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방식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자신을 통째로 우리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다가오시고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소통방식에서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 까지 관통되는 내용입니다.
우리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역시 자기 백성을 믿고 신뢰하십니다. 우리만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역시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부부사이에 서로 간에 깊은 사랑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비록 어느 일방이 큰 허물을 남기더라도 그것을 크게 탓하지 않고, 믿어줄 때가 아닙니까? 왜 크게 탓하지 않습니까? 왜 끝까지 믿어줍니까? 서로가 서로를 맡기는 관계가 부부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 믿어주는 관계가 부부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서는 주님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에 기록된, 신랑이신 주님은 끝까지 신부를 찾아오는 주님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신부가 부족하고 허물과 죄를 남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랑은 신부를 찾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음란한 아내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찾아가는 남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래 신랑과 신부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자기 전체를 맡기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이런 사랑입니다. 내가 비록 죄와 허물을 남김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이기에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내가 비록 죄와 허물을 남김에도 불구하고, 나를 결코 떠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나에게 맡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소통하실 때 전능하신 방법이나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얼마든지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성막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화염검을 두어 성막을 둘러싸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성막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신뢰하시고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이 오늘날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찾아오십니다. 강압적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믿어주셔서 자신을 맡기는 방식으로 찾아오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백성이 문을 열어 줄 것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드릴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을 할 때는 이렇게 부족한 나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믿어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믿어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통 방식은 본문 말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을 통해 함께 대화하면서 함께 걸어가시며 서로 마주보며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통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나아가서 내 안에 들어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청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쑥 들어오라.”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여 올려 보내고, 잎에서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만들어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나무와 가지는 꼭 붙어 있는 가운데서 서로 운명공동체로 존재합니다.
가지로서 내게 붙어 있으라는 말씀은, 너희만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너희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가지는 단지 나무 옆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안에서 한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지가 없다면 그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있기에 그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나무와 가지는 100%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존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는 말씀은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강압적으로 너를 지배하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존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애원하기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하나님께 내 말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요구만 하고 떼를 쓰는 것만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역시 기도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할 때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들을 때도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나님께 애원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하나님의 애원을 듣는 것 역시 기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이 사실에 대해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몸에 하나님께서 계셔서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며, 동시에 얼마나 두려운 사실입니까?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이며, 동시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요구하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단지 우리를 조종하거나 부리시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물으시며, 때로는 우리에게 애원하시고,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소통방식은 설득이지 강제적으로 밀어 붙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의 전능하신 힘으로 강제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소통하려고 하실 때 당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또 설득하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의 죄와 허물이기에 그것을 우리가 지도록 강제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 죄의 짐을 주님께서 대신 지고 가겠다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자식에게 회초리를 대기보다, 부모로서 차라리 자신의 다리에 매질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다리에 매질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자식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통방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끊임없이 설득하고 계시지,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자신을 맡기시고, 우리에게 묻고, 우리에게 애원하시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신뢰하시고 통째로 자신을 맡기면서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화답을 해야 합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소통방식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통째로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셨듯이, 연약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죄를 범할 때, 우리는 내가 허물을 남길 때, 아무런 일이 없는 것으로 인해 교만해 지거나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품은 생각을 알고 계시고, 내가 골방에서 마음속으로 속삭였던 말까지 듣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인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 감아 줘서가 아니라, 그래도 자기 백성을 믿어주시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주시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를 믿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내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피조물에 불과한 저와 여러분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연약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셨는데, 연약하고 실수가 많은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