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에 따르면 우선 부활의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후, 그 날 바로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가 있을 때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 주님께서는 디베랴 호수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주님은 베드로와 특별한 대화를 나누십니다.
부활 후 주님께서 이와 같이 나타나신 이유는 첫째, 부활의 증인들을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부활의 주님으로서 그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확신과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우선 부활의 주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입니다. 마리아는 갈릴리 서쪽 막달라 출신의 여자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주님으로 부터 고침을 받은 후 그녀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여자가 됩니다. [눅8:2]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준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마27:56]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눅23:55] 무덤에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그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눈물만큼이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 자체가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온전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는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죽으심을 목격했지만 사랑하는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제자들에게 2번 나타나셨습니다. 2번 나타나신 것은 도마 때문입니다. 도마는 유별나게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말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못 박히신 손, 주님께서 창으로 찔리신 그 옆구리를 물리적인 방법으로 확인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의심은 가장 큰 질병입니다. 주님께서는 도마의 의심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의 목적은 도마가 어찌하든지 믿는 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창 자국에 손을 넣어 보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신앙고백을 드립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도마가 가지고 있었던 의심의 손금을 가지고 태어나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의심의 손금을 지워버리고 믿음의 손금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도마처럼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는 신앙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이러한 고백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여러 사연들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특별합니다. 21장 1절에서 14절까지 말씀입니다.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그들을 제자로 삼기 위해 처음으로 부르실 때를 연상케 합니다. 디베랴 호수에서 그들은 예전처럼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고기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처음 부르실 때처럼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처음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부활의 주님으로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는 말씀을 다시 하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면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는 말씀을 기억해 냈을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주님은 성육신의 주님이셨으며, 지금의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같은 주님이지만 영적인 의미가 달랐으며 이것은 새로운 차원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들은 처음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실패의식 속에서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낙담과 절망과 죄책감 속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사람들이며, 그 중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들을 치유하고자 디베랴 호수가에 나타나셨습니다.
디베랴 호수가에서 주님께서는 손수 식탁을 준비하셨습니다. 직접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구우셨습니다. 떡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주시고, 직접 구운 생선도 먹으라고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손수 준비하신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나즈막한 파도소리가 귀청을 때립니다. 식사를 하면서 어떤 대화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화가 없었던 것은 대화 보다도 더 강력한 교감이 그 식탁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식탁의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용서하셨음을 제자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것, 특히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3번 부인했던 것,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식탁에서 주님의 침묵은 정죄의 침묵이 아니라 용서의 침묵이었음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식탁에서 제자들은 눈시울을 훔치며, 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윽고 주님께서는 침묵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식탁만으로도 제자들의 마음의 찌꺼기를 다 걸러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마음의 찌꺼기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알고 믿지만 그래도 감히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여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했던 일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덤에 갈 때 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이러한 베드로를 치유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 자체가 치유의 음성인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붙여준 별명으로 ‘반석’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주님께서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묻습니다. 혈육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아버지를 생각나게 만들고, 가족을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어부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생업과 가족을 버려두고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는 질문은 예전처럼 나를 다시 쫓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여러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네가 처음 배와 가족을 버려 두고 나를 쫓은 것을 기억한다.” “너는 열정적으로 나를 쫓았다.” “그러나 연약해서 나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너를 모두 용서한다.” “내가 너를 여전히 제자로 삼고자 하는데 너는 나를 따르겠느냐?” 이런 의미들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제가 주님 사랑하는 거 두 말 하면 잔소리죠. 여기 다른 제자들 보다 주님 사랑은 저 만큼 뜨거운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제 심장이라도 까뒤벼 보여 드릴까요?”
그러나 이제 그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는 과거에는 찾을 수 없는 겸손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답 속에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3번 반복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에 대해서 3번 부인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여종 앞에서 3번 주님을 모른다고 한 후,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게 됩니다. [마27:75] 그가 이처럼 통곡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호언장담하며,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말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3번 주님을 부인하였으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3번 주셨습니다.
상담치료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아픈 기억이 있을 때, 그 기억에 상응하는 방법이나 상응하는 분량으로 접근을 할 때 치료가 이루어진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테면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훗날에라도 그 아픈 기억이 치료받으려 해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훗날 결혼을 통해서라도 그 사랑을 받아야 치료가 이루어지는 진다는 것입니다. 결혼이 오히려 아픈 상처를 더 키우는 악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결혼이 그 사람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보금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여하튼 과거의 아픈 기억은 약물치료로도 안 되고, 다양한 정신수련으로도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아픈 기억은 어부 시몬으로 돌아가서 디베랴 호수에서 다시 고기잡이를 한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3번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베드로가 안고 있는 기억으로 부터 자유롭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기에 나의 양을 너에게 맡긴다.” 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베드로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 주목하여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사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할 때 자기 아내 될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지옥에라도 따라 가겠소.?”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어디든지 가고자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준 사명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는 데 너의 생애를 바치라” 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을 사랑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사명의 내용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번째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고, 두 번째는 “내 양을 치라.” 말씀하셨고,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은 이제 갓 주님의 울타리에 들어 온 양입니다. 처음으로 구원에 대해 알고 주님과 첫 사랑을 맺은 양입니다. 이런 양은 열심히 먹여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의 꼴을 먹여서 무럭무럭 자라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 양이 성장하게 됩니다. 성장하면 양을 단순히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양을 치게 됩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훈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양이 언제나 양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이들을 먹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 주셨습니다. 주옥같은 산상수훈을 무리들과 함께 듣도록 하셨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을 때는, 직접 찾아가셔서 고쳐 주심으로 베드로의 체면도 살려 주셨습니다. [마8:14]
그러면서 그들은 조금씩 자라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여행을 다녀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의 명령은 “양을 먹이라” 입니다. 훈련받은 제자라도 실족하게 되고,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이 때는 다시 그 양을 먹여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어린 양이 아니지만, 먹여야 할 양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회복해야 하며,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해야 할 양입니다. 또 다시 치료받아야 할 양이며,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할 양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는 훈련받은 제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낙담과 절망 가운데 디베랴 호수에 예전과 같은 시몬이 되어 고기를 잡으러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는 것과 처음부터 주님과의 관계성이 잘못되어 배반하는 것은 다릅니다. 베드로는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배반했고, 가룟유다는 주님과의 관계성 자체가 잘못되어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연약함 때문에 한 실수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됩니다. 베드로의 배반이 오히려 지금은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약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배반은 오히려 주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성숙한 사랑 때문에 그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정과 혈기에 따른 사랑, 자기 확신에 기초한 사랑은 언제든지 자신을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그 사랑 마저도 맡기는 사람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혈기 속에 있었던 베드로는 전도여행 다녀올 정도는 되었지만 세계를 품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해 부인한 후 낙담과 절망 속에 있다가 주님의 다시 찾아오심으로 치료받은 그는 이제 세계를 품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예언의 말씀을 또 하십니다. 혈기 속에 있었던 베드로에게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는 예언을 하셨지만, 지금의 베드로에게는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죽음의 십자가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네가 가고 싶은 곳을 택할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네 손을 십자가 상에 벌리어서 못 박아 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네가 택하지 아니한 길로 데려가리라.” 는 말씀입니다.
실제 로마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죽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십자가로 가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하는 순간에 베드로는 군병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시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기에는 너무 비천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매달려 죽겠다고 요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 정도로 성장하기 까지 주님의 인도하심과 용서와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름에 있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었고, 사랑은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을 수반하고, 사랑은 언제나 희생을 수반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각오를 하게 됩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 속에 암시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장차 베드로는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 그리스도의 백성을 위한 위대한 목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땅 끝 까지 나아갔던 바울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제자들 중에 늘 주님의 품에 의지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 제자가 주님과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리상으로 그 제자가 주님과 가장 가까웠을지라도 주님의 사랑에 대해 불을 품고 있었던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고자 함에 있어 망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주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셨을 때 한 여인이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으며 주님의 발을 머리 털로 닦으며,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게 됩니다.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의 행동을 보고, 주님께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사명은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가 아닙니다. 단순한 의무감 속에서 은혜도 없이 감당하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사명이 있기 전에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주님 안에서 나의 어떠한 죄가 용서를 받았는가? 내가 늘 주님을 배반해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이 사명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위해 값비싼 옥합을 깨뜨리는 것, 시몬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상에서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 이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간절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저와 여러분도 시몬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