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3장2절의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4장17절의 예수님의 메시지도 세례요한과 같습니다. ‘천국을 준비하기 위한 회개’ 가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고도원이라는 사람이 쓴 ‘꿈 너머 꿈’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재미없지는 않은가? 매일 출근하는 회사가 그저 밥벌이의 수단일 뿐이라면?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치기만 할 뿐 무엇에도 의욕이 없다면? 학교 가는 일이 그저 일상의 반복일 뿐 힘들기만 하다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지금 당신은 꿈을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일상의 여러 일들에 대한 의미를 모른다면 꿈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의사나 교수나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그것을 이루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면 매일 아침 출근하는 교수, 무거운 가방을 든 학생, 그들은 어제와 같은 고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한 사람일 뿐이다. 이미 자신이 원한 꿈을 이루게 된 사람들은 행복할까?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이들에겐 꿈 너머 꿈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본인이 원하는 꿈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을 이루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다음 생각이 없다면 ‘꿈 너머 꿈’ 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꿈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꿈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고, 어떤 꿈을 이루었다고 해도 다음의 꿈, 다시 말해 ‘꿈 너머 꿈’ 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꿈에 관하여 이 세상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이렇습니다. 꿈을 달성하지 못해 좌절한 사람들, 아예 꿈이 없는 사람들, 하나의 꿈을 달성한 사람들, 그리고 다음의 꿈을 꾸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꿈을 달성하지 못해 좌절한 사람들이나, 꿈을 달성한 사람들이나 다음의 꿈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결국은 그 꿈으로 인한 완전한 만족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꿈은 아무리 달성해도 허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허전함이 없고 완전한 만족이 있는 곳은 어떠한 곳이겠습니까? 그 다음의 꿈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천국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죄와 사망권세가 없는 나라, 영생하는 나라 등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천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면 그 다음의 꿈이 필요 없는 나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의 소망을 달성하면 또 하나의 소망이 눈에 보이고 이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천국은 완전한 소망의 나라여서 그 다음의 소망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15절과 16절을 보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큰 빛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면 완전한 소망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더 이상의 소망이 필요 없습니다.
또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라는 말씀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실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며,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인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 내가 마치 흑암에 앉아 있으며,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가정이 파괴되든지, 큰 질병에 걸리든지, 전쟁을 겪든지, 망해서 길거리로 쫓겨나든지 하면 내가 흑암에 앉아 있으며,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나의 인생에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없다고 해도 사람의 실존자체가 죄와 사망의 권세 속에 있고 그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최종적인 열매가 무엇입니까? 지옥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큰 빛을 보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그러한 내 실존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흑암에 앉은 내가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되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던 내가 영생의 나라에 앉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따스한 품 안에 안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의 나라, 하나님의 따스한 품 안은 더 이상의 꿈이 필요 없는 완전한 소망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천국은 회개하는 자의 나라입니다. 완전한 소망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 하면 회개하는 자의 것입니다.
사람은 회심하는 그 순간부터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며, 주님의 나라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사람이면서 주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죽거나 그 사람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면 더 이상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주님나라의 백성인 사람은 영원토록 주님나라의 백성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의 영역과 그 그림자에 살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이 죽음의 영역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죽음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자가 언제까지나 그림자로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그림자가 인생의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이 때부터’ 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긴급함을 내포합니다. 죽음이 지금은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영원한 심판도 그림자처럼 보일런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실제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긴급함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긴급함이 있습니다. 그 긴급함은 회개는 내일이나 모레로 시간을 늦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시간은 내게 많이 남아있다, 적게 남아 있다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회개의 시간은 지금 당장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남아 있는 이 회개의 시간이 기회의 시간이고 소망의 시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메시지 속에는 이런 긴박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장차 가게 될 나라이기도 하지만 지금 만끽할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옛말에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못 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죄 지은 사람은 발 뻗고 못 자고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 때문에 발 뻗고 자지 못했습니다. 뼈가 쇠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을 때 비로소 천국이 임했고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좋은 사람은 늘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합니다. 내 마음에 분노가 있거나, 염려가 있거나, 두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분노, 이 염려와 두려움이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것도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무엇보다 항상 내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분노할 필요도 없고 염려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늘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흑암에 앉아 있는 것 같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듯 생각되어 질 때, 이 때부터 전파하신 주님의 메시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는 말씀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내 심령이 흑암이요 지금까지는 내 삶이 사망의 땅과 그늘이었지만 지금부터는 내 심령이 하나님나라의 빛이요 지금부터는 내 삶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