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장, 고린도교회의 분쟁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듣고 아비의 심정으로 쓴 서신입니다. 본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형제가 싸우면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듣고 아비의 마음으로 마음 아파합니다.
제자양육의 경험이 많은 분은 바울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양육에는 물질과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이렇게 쏟아 붓고도 열매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도를 하고 양육을 합니다. 자기 삶을 희생합니다. 한 명의 제자가 탄생할 때 까지 합니다. 이것이 제자양육입니다.
고린도교회 역시 바울의 이러한 헌신 속에 탄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15절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밝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단순히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적당한 때가 되면 이동하는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으로서 한 생명을 잉태하고 낳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일만 스승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아비였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교회의 분쟁소식은 바울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쏟아 부었던 애정만큼이나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권하다’ 는 말은 간절한 호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호소하는 심정으로 ‘같은 말을 하고 온전히 합하라.’ 고 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자들은 창시자들의 이름을 따라 플라톤파, 아리스토텔레스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레스학파로 나뉘어서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고린도교회도 헬라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즉 그들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심으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바울은 무엇을 밝힙니까? 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말씀합니다. 바울은 사람 중심으로 되어 있는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립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이 세례를 받았음을 밝힙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바울의 이름과 아볼로의 이름과 게바의 이름이 높여진 상태입니다.
바울파는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분파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율법의 종말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는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방종으로 만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볼로파는 아볼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분파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웅변가이며 성서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아볼로파는 지성을 추구했고, 아름다운 문장에 열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볼로파는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유대인 이름입니다. 그래서 게바파는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십자가의 은총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모두를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규모로 몇 개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는 3개의 분파와 나름대로 자칭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시끄러웠습니다.
바울파는 바울의 단순한 메시지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논리적인 달변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장식된 아볼로의 메시지를 들으면 머리가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파는 자유의 복음을 깊이 체험하고, 먹는 문제에서도 자유로웠기에 선지국을 못 먹는 게바파를 무시했습니다.
아볼로의 메시지는 바울보다 세련되고 화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양있는 상류계층의 신자들은 아볼로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지적 수준이 아래라고 생각하는 바울파나 융통성 없는 게바파를 싫어했습니다.
게바파는 유대인 중심의 베드로 추종 세력이었습니다. 게바파는 바울이나 아볼로가 열 두 사도 에 속하지 않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정통성이 베드로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칭 정통보수파가 게바파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이 따르지 않는 바울파를 무시했고, 설교만 좋아하는 아볼로파를 경멸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를 중심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참지 못한 또 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들입니다.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며 그리스도파로 이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그럴듯하지 결과적으로는 또 하나의 당파를 만든 것입니다. 학자들은 자칭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들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추종세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유대주의자들이었으며, 독신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들의 분파싸움은 본질을 놓쳐 버리고 비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지나친 율법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고, 지나치게 방종에 흐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준엄한 율법에 대해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만 좋아하고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제자의 도리를 가르칠 필요가 있고, 자기 신앙만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겸손을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가능한 일들입니다. 교회마다 분쟁이 있고, 분쟁의 양상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쟁이 있게 된 데에는 내력(來歷)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쟁은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골이 아주 깊습니다.
분쟁이 해결되면 그 분쟁은 연단의 과정이 되지만, 그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분쟁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됩니다.
에베소서 4장2절에서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말씀에 비추어 고린도교회에 이런 분파가 생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아는 담임목사님이 임지를 옮기셨습니다. 그러자 그 교회 중직자 중에서 더 이상 그 교회를 나오지 않는 분이 생겼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동안 사람 중심으로 신앙생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면 목회자의 이동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지킵니다. 교회법상 항존직이라는 것이 왜 있습니까? 그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자기 영광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4장 6절에서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 사실은 겉으로는 자기들이 추종하는 지도자를 내세우지만 내심으로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바울의 이름을 거론하고, 아볼로의 이름을 거론하고, 게바의 이름을 거론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도가 넘어섰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성향은 달랐지만 기록한 말씀의 범위는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름과 아볼로의 이름을 빌어 분파를 형성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말씀의 범위를 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성 중 하나는 자기와 뜻이 다르거나 이해관계를 달리하면 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도권을 쥐고자 합니다.
셋째, 십자가의 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십자가이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은총의 십자가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분파들은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고린도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기교만과 영광을 버려야 하며, 십자가의 도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바울은 어떻게 하라고 권면합니까? 다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을 보면, 바울은 성도들이 서로 다른 은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을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을 꺼려서 손대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다양성 가운데 같은 말을 하라고 호소합니다.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각 연주자가 다른 악기를 연주해도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각자 맡은 부분을 잘 하여 가장 아름다운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보아야 합니다. 당회가 하나가 되면 교인들은 교회의 정책을 믿습니다. 제직회가 하나가 되면 교회사역에 역동성이 생깁니다. 각각의 남선교회와 여전도회가 하나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각 기관을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을 버리고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품을 때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뜻을 가지라는 말은 각 개인의 뜻만 주장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뜻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합심입니다. 합심하는 꼴등이 분열하는 1등보다 강합니다. 외부의 엄청난 규모의 공격보다 내부의 분열이 치명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부의 이단세력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면 하나님의 교회를 아무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분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이고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죄입니다. 사도행전은 합심의 역사였습니다.
사도행전 시대에도 이단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단의 세력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을 견고케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입니다. 초대교회는 믿음이 정체성이 분명한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어 기도에 집중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초대교회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의 이단의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단의 세력 앞에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믿음의 정체성을 견고케 해야 합니다.
14절과 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 집 사람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오히려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무도 자기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은 낮추고 주님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도록 힘썼습니다.
17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주님은 오직 복음을 전하고자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가지고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받게 하십니다. 그것이 사역의 시작이며 사역의 과정이며 사역의 마지막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경계한 것은 말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만연되었던 아름다운 수사학과 철학적 웅변을 동원한 기술을 뜻합니다. 십자가를 드러내려고 말의 지혜로 하다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됩니다. 헛되게 된다는 것은 힘을 잃고 효과를 상실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의 지혜는 전하는 내용보다 전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라보게 하며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게 합니다. 전도자는 복음보다 말에 끌리게 해서 ‘내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분쟁의 원인이 됩니다. 유창하게 설교를 하여 감동을 주어도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경계했습니다. 나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십자가가 가려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28절을 보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항상 교회에 대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염려라는 것은 교회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늘 바울의 마음은 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한 마음을 표현할 때, ‘초 겨울 살 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고 말합니다.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 속에는 시험도 많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파문제 뿐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이러한 문제를 징검다리 삼아 일어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