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린도 교회는 A.D.50년경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직접 창립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가 위치했던 고린도는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도 매우 번성하는 항구 상업도시였습니다. 항구 상업도시는 대부분 각종 문화가 섞여 있었는데, 고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질문명을 우선시하는 로마 세속 문화, 그리스-로마의 각 종 신들에 대한 숭배, 지식층에서 주로 신봉하던 각종 철학적 종교들, 로마 군인이나 행정 관료들이 숭배하던 밀의 종교가 떠받드는 우상 숭배가 극심하였습니다. 특히 성도덕이 문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 배경 속에 인간관계는 타산적이고 살벌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하고 음란한 도시에 고린도 교회를 세우셨고, 고린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특별히 성령의 은사들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들로 충만케 하셨지만 그 도시의 문화적 배경 속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분파주의와 사랑의 결여와 은사의 남용이 그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1절과 12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분쟁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이처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 각기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은사에 대한 생각에도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은사만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은사를 자랑하는데서 도를 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남용하기도 했던 곳이 고린도교회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사도바울은 그 잘못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 말하면서 다시 하나가 되도록 호소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분파주의가 극심합니다. 그 분파주의의 뿌리에는 사랑의 결여가 있고, 자기의 은사, 혹은 자기 교회의 은사만을 주장하고 자랑하는 편향적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로 충만케 하기를 원하시지만, 충만한 은사로 말미암은 부작용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말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병고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도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언을 하는 사람, 통역하는 사람, 영을 분별하는 사람,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 모두 자기의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에 대해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내가 잘 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선물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 잘 섬기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따르면 분파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단지 부족함과 영적무지의 소치입니다. 또한 자기가 가진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성령의 은사들로 충만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것은 새롭게 알려 주고자 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것은 이미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교회 보다 충만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것은 이미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알고 있는 것인데, 바르게 알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바울은 너희의 구원이 신령한 것 곧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말합니다. 3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를 주시라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한 성령을 받은 사람들임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아닌가? 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 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예수를 주시라’ 시인하게 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신앙공동체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라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은사들로 충만하였지만, 그들은 그들의 심령에 내재하고 계시는 성령의 본질적 사역에 대해서는 무지하였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깝게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계시는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은사가 그들이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성령에 대한 전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표면만 알고 그 속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은사들로 충만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성령의 본질적 사역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머무는 위치를 뜻 하는 말로 헬라어에서는 3가지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첫째는 ‘엔’ 입니다. ‘엔’ 은 ‘속에’ ‘안에’ 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8장9절에서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때 사용된 전치사가 ‘엔’ 입니다.
둘째는 ‘파라’ 입니다. ‘파라’ 는 ‘곁에’ 혹은 ‘함께’ 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14장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함께’ 가 파라입니다.
세째는 ‘에피’ 입니다. ‘에피’ 는 ‘위에’ 혹은 ‘위로 부터’ 라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3장22절을 보면,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위에’ 를 뜻하는 말이 ‘에피’ 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위에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확증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위에 계셔서 하나님 영광을 구하고 바라보게 하십니다.
성령의 본질적 사역은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분파싸움을 하지 말고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을 깨닫고 발견하며 그 성령께 순종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 는 메시지입니다.
덧 붙여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서 6절을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에게 있는 은사, 너희의 직분, 너희가 감당하고 있는 사역은 모두 한 분이신 성령, 한 분이신 주님,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은사의 귀하고 천함이 없으며, 너희가 감당하고 있는 직분과 사역에 대해 귀하고 천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한 분이신 성령, 한 분이신 주님,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신령하고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은사에 대해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직분과 사역에 대해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분 이신 성령으로 부터 그 은사를 받았고, 한 분이신 주님,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 그 직분과 사역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의 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판단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의 직분과 사역을 내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내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께 내가 순종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 은사에 따라 직분과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그 사람의 은사가 소중하고, 그 사람의 직분과 사역이 소중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소중히 여기시지 때문에 신령한 은사를 주셨고, 신령한 직분과 신령한 사역을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서로간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경쟁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12절 말씀을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7절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은사에는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없고, 직분과 사역에도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없으며, 무엇보다 은사와 직분과 사역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두 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에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내 몸을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치통이 있다면 치통 하나 때문에 온 몸이 아픈 것입니다. 다리 하나만 불편해도 전체 몸이 불편해 지고, 팔 하나만 불편해도 전체 몸이 불편해 지는 것입니다. 위장이나, 심장 어느 하나가 탈이 나면 사람의 몸은 전체가 힘들어 지게 됩니다.
그래서 종합검진을 받게 되고, 내가 모르는 어떤 병을 예방하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병이 난다는 것은 몸 가운데서 분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5절을 보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독불장군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함께 이루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때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29절에서 31절을 보면,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 말씀합니다.
모든 은사가 귀한데 그 은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사주의와 큰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은사주의는 은사만을 자랑하며 그것을 신앙의 자랑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큰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더욱 잘 섬기기 위해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사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은사를 사모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은사를 사모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왕성하게 나타나는 교회였지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은사로 만족하거나 자기가 얻은 은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교회였습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교회입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늘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한계를 느끼는 사람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합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는 바울의 메시지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은사만으로도 부족함을 느끼는데 다른 사람을 판단할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 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 말씀하면서, 13장 말씀, 우리가 흔히 일컫는 ‘사랑장’ 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의 심령과 사랑의 행동이 은사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할 때 그 정점은 사랑의 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는 어떤 의미에서 은사의 차원을 넘어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특별한 목적을 달성한 후 없어지는 것이지만 열매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8절을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구해야 할 은사가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줍니다. 사랑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많은 사람의 영혼을 살립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여러 은사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도의 직분에도 사랑의 은사가 있어야 하고, 교사의 직분에도 사랑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능력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는 것에도 사랑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에도 사랑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도 사랑의 은사가 있어야 하고, 교회 정치, 행정에도 사랑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과 각 부서에도 사랑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은사가 있을 때 그 사역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은사가 가정에 충만할 때 그 가정이 행복합니다. 사랑의 은사가 교회에 충만할 때 그 교회가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