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끝인사 축도

영구한도성 2022. 7. 27. 18:30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13 主 예수 그리스도의 恩惠와 하나님의 사랑과 聖靈의 交通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인사’입니다. 그 ‘끝인사’ 의 내용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배에서, 예배의 맨 마지막에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축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축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축도의 주체는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도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는 축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축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령과 동행할 수 있는 축도를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 축도를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무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축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자신의 축도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무리들에게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러한 축도를 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교인들로 하여금, 편지의 맨 마지막에서 다시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축도의 내용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내용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은 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축도의 내용에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가면 그것 역시 축도가 아닙니다.

 

가장 바람직한 축도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음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어디에 있다고 말씀합니까? ‘너희 무리와 함께 있다.’ 고 말씀합니다. 즉 교회 공동체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맹점(盲點) 중 하나가, 지나치게 개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신앙은 중요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은혜가 없이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체험이 없이는 교회를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개인의 신앙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축도의 내용 속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위대한 진리가 있으며, 동시에 이 축도의 내용 속에는 교회공동체에 관한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 공동체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은혜가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보면,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말씀합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 이라는 것은, 지금 순간순간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 순간순간이 구원의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 질병으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 임종을 준비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 인생의 큰 실패를 맛보고 낙담하고 있습니까?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 가정에 크나큰 고통이 있습니까? 가정에 크나큰 불화가 있습니까?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 실직으로 힘들어 합니까? 가난으로 힘들어 합니까?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 그리고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순간순간의 삶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내가 알던 모르던, 매일 매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주님을 배신하고 불신합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마음에 죄를 품고 살아갑니다. 죄악 된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데, 마치 주님께서는 나에 대해서 눈을 감고 계시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불신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용서하고 계시고, 교회 공동체를 용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매일 매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 시간 죄와 허물로 더러워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은 매일 매시간 우리를 씻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세상의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8장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다.’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런 곳입니다. 광대하고 위험한 곳입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어서 물리면 죽는 그런 곳입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기꾼이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돈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서로 포용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아니라, 경쟁하고 불신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살벌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살벌한 세상에 항상 노출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군사용어에 ‘핵우산’ [nuclear umbrella, 核雨傘] 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핵무기 보유국의 핵전력(核戰力)에 의하여 국가의 안전보장을 도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핵우산' 밑에 들어간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산' 이란 것은, 핵무기를 가진 가상적국(假想敵國)의 핵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핵에 대한 방패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백성을 사탄의 모든 핵공격으로부터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낙심하여 쓰러져서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를 일으키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전히 떠나 살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매일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가 우리를 지켜 주고 있고,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은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얼마나 풍요로운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원이 천국 갈 때 까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한 주 동안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셨듯이, 현재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시면서 이 세상에서 능히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 앨리스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 공주에게는 네 살된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어린 아들은 불치의 병이자, 위험한 전염병으로 알려진 블랙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공주의 주치의는 공주에게 절대로 아들 곁에 가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게다가 앨리스 공주는 체질이 유난히도 약했다고 합니다.

 

앨리스 공주는 할 수 없이 아들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넓은 방 한구석에 서서 멀찌감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간호하던 간호사가 침대 곁에 갔을 때, 어린 아들은 멀리 서 있는 엄마를 보며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왜 우리 엄마는 더 이상 나에게 가까이 와서 입 맞춰 주지 않나요?" 라고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지막한 아들의 목소리를 구석에 서서 듣던 엄마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아들에게 단숨에 달려가서 말하였습니다. “미안해, 엄마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 한단다' 말하고, 어린 아들을 꼭 껴안았습니다. 의사의 경고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깊은 모성애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엄마 앨리스는 그 위험한 전염병에 걸려 몇 주가 지난 후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들과 함께 나란히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죽음의 키스를 통하여 어머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보이고, 아들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사랑은 꼭 귀한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무슨 일이 안 되면 하나님사랑을 불신합니다. 반대로 너무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신하고,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견책하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매일 매 순간 우리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배반하지 맙시다.

•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불신하지 맙시다.

•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그 사랑을 붙듭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믿읍시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교통’ 이라는 단어는 ‘교제’ 혹은 ‘사귐’ 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말씀합니다.

 

성령의 교통 혹은 사귐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누립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성령께서는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3절에는 성령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고,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속성 중 하나가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늘 자신을 감추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말씀합니다.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속하지 않았는지? 분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 영이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영이라면 하나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 영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영이라면 하나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런데 그 영이 사람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를 사람에게로 인도하는 영이라면 사탄의 영입니다.

 

이단 교주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결코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하나님이며,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목사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사탄의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주님의 양떼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모이도록 하는 사람이라면 이 역시도 사탄의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목사라는 직분 자체가 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의 성령 안에서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통’ 이라는 말은 ‘반려자’ 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성령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 인생의 반려자가 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성령과 동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십니다. 스스로 판단하시고, 스스로 결정하시며, 웃기도 하시고, 울기도 하시며, 탄식하기도 하시는 인격체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격체이신 성령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성령의 교통하심’ 에 대해 각 교단마다, 교수 마다, 목사 마다, 신학적 견해가 달라,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은 신학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령 하나님’ 에 대한 신학적 이론과 실재의 적용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합동측에서는 성령님께서 현존하실 때 나타나시는 역사는 초대교회로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에 대해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이단 취급까지 합니다.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어느 신학대학교 교수도 있습니다. 그 교수가 강의실에서,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방언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70% 이상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는 이 현상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어 말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슬픈 일 중에 하나가 신학자들이 자기가 만든 신학의 틀 속에 성령을 가두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에 대해 무지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더 이상 이성과 합리성으로 신앙 생활하지 마십시오. 성령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경험하십시오. 참으로 위험한 신앙생활은 성령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믿지 못하고, 신학적 교리 속에 갇혀 지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할 때, 이 성령의 교통하심은 우리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해서 역사하는 그 역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성령님, 사랑합니다. 지금 내게 충만히 임재 하여 주옵소서. 외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성령께서 늘 하나님아버지 곁에 계시듯,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늘 하나님아버지 곁에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늘 함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