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6절과 7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말씀합니다.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6절과 7절 말씀처럼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리고 19절 말씀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속성 자체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육적생명이 어머니 모태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듯이 영적생명도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합니다.
사람이 모태에서 태어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그 생명이 자라고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리를 잘 해 줘야 합니다. 때마다 예방접종도 해야 합니다. 영아기 때는 어머니 젖과 이유식도 섭취해야 합니다. 자라면서 좀 더 질긴 음식도 먹어 줘야 합니다. 운동도 해야 하고, 규칙적인 생활습관도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방접종도 필요하고 젖과 이유식도 필요합니다. 질긴 음식도 필요합니다. 운동도 해야 하고 영적인 생활습관도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11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기서 장성한 사람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하게 장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건강하게 장성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려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성장은 개인적 영적성장과 교회적 영적성장이 있습니다.
개인적 영적성장은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더 깊어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 성령의 열매를 맺어나가는 것입니다. (갈5:22) 하늘나라의 비밀도 더욱 알아나가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이도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것이며, 점점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적 영적성장입니다.
교회적 영적성장은 내가 교회의 지체로서 자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교회지체로서 다른 성도들과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말씀합니다.
온 몸이라는 것은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입니다. 곧 손, 발, 눈, 코, 귀, 심장, 간, 폐, 늑골, 척추 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지체는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입니다. 머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각 지체인 성도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랍니다. 자라는데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자라갑니다. 마디는 연결성을 의미입니다. 즉 각 지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지체와 지체 사이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힘줄은 연결된 지체사이의 힘 곧 능력을 의미합니다. 연합하여 자란다는 것은 어느 한 지체가 비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자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개인적 영적성장과 교회적 영적성장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 영적성장 없이 교회적 영적성장이 없고 교회적 영적성장이 없이 개인적 영적성장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깊어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개인이 있어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나 홀로 집에 있으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도들과의 교제 속에서 맺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다른 교인들과 별 사귐이 없고, 관계성이 없어도 스스로는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과 사귐이 없고 관계성이 없다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보실 때 하나의 몸으로 보시기 때문에 교인들과의 사귐이 없는 사람을 “신앙이 좋다.” 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개인적 영적성장과 교회의 영적성장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팔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팔만 거대해 지고, 튼튼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 교회는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처럼 이상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코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코만 길어지고 거대해 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 교회는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처럼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폐활량이 뛰어난 사람은 많이 뛰어도 숨이 차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뛸 수는 없습니다. 결국 혼자 뛰고 다른 사람은 뛰지 못해 교회에 균열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성숙은 하나님과의 1:1관계성과 더불어 교인들과의 연합적 관계성 속에 판단될 수 있습니다. 19절 말씀처럼 개인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연합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비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연합적 관계성 속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자라갑니다. 건강한 성도는 교회의 연합적 관계성 속에서, 곧 공동체 속에서 자라갑니다.
교회의 연합적 관계성을 이루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것이고, 또 하나는 떡을 떼는 것입니다. 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서로 떡을 뗄 때 교회는 연합적 관계성 속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서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서로 떡을 떼는 모습은 출애굽하기 직전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가장 원시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을 때 마지막 재앙이 장자재앙입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은 하나님께서 그 집의 장자는 죽이지 않고 넘어가셨습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그 집의 가족들은 집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있었고, 떡을 떼고 있었습니다. 그 집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떡을 떼던 바로 그 가족들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권세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죄와 사망권세가 지나간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떡을 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것은 무엇입니까?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뿐만 아닙니다. 간증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고, 성도님들 사이에서 서로 은혜를 나누는 것도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에서 떡을 나누는 것은 무엇입니까?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고, 다과를 나누는 것이며, 함께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곧 교제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식탁을 함께 한다는 것은 세상사람과 세상이야기를 하며 식탁을 함께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거룩한 것입니다.
주님의 최후의 만찬이 거룩한 만찬이었듯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거룩한 식탁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떡을 뗄 때 그 뿌리가 튼튼하여 지고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을 방해 하는 이단세력이 있습니다. 그 이단세력에 대해 본문을 보면, 철학, 헛된 속임수, 전통과 유전, 우상숭배, 신비주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단 세력들은 그리스도에게 뿌리 내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려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러한 이단 세력은 마치 뿌리벌레(root borer)와 같습니다. 뿌리벌레는 식물의 뿌리에 구멍을 내는 곤충의 애벌레 또는 성충을 의미합니다. 뿌리벌레가 식물의 뿌리에 구멍을 내면 그 식물이 정상적으로 자라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것처럼 개인 신앙에도 뿌리벌레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 내리고 자라서 열매 맺으려는 것을 방해합니다. 교회에도 뿌리벌레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 내리고 자라서 열매 맺으려는 교회를 방해합니다.
첫째 미혹의 세력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입니다. 8절을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철학은 주로 영지주의 철학입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철학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입니다. 결국 영적 존재인 그리스도는 악한 육체를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육체의 죽음을 당하신 것을 부인하게 되고, 육체의 죽음을 당하신 것을 부인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죄와 사망권세를 멸하신 사실까지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1장7절을 보면 영지주의가 이단임을 명시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인자 곧, ‘사람의 아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요 6:53)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영지주의는 믿음에 속한 영역이 아니라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합니다.
헛된 속임수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거짓말, 꾸며낸 말입니다. 헛된 속임수는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사심이 있거나 나쁜 의도가 있어서 헛된 속임수를 쓰기도 하고, 습관적으로 헛된 속임수를 쓰기도 합니다. 사람은 헛된 속임수를 통해 복음을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기복신앙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헛된 속임수가 될 수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 역시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21절에서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만물의 머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를 다스린다는 점에서 만물의 머리이십니다. 또한 만물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 역사하는 영적유기체입니다. (엡1:23,4:15,16)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에게 뿌리를 내려야 하고, 예수님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둘째 미혹의 세례는 전통과 사람의 유전입니다. 당시는 할례에 관한 논쟁이 이었습니다. 할례는 본래 하나님과 택한 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또한 할례는 인간의 부정을 제거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할례가 시간이 흐를수록 형식화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육체의 자랑거리로 잘못 사용되었습니다. (갈6:13) 심지어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할례를 내세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행15:1,2)
바울은 잘못된 할례관을 지적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확증하기 위한 행위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믿음이 먼저고 할례를 그 뒤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에게 세례식을 행합니다. 그런데 물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물세례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행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은 물세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면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3:16)
그러므로 물세례 역시 율법화되면 안 됩니다. 세례식 자체가 최대한 엄숙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영적 비중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물세례 없이 구원은 없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14절에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 는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스르고 대적합니다. 이 말은 죄로 오염된 우리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인하여 율법이 우리의 죄를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롬3:20)
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해결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갈3:24) 그러므로 율법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입니다. (롬7:12)
그러나 율법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소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갈2:16)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율법도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롬 8:23)
그러나 바울은 율법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율법도 더욱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롬3:3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무엇도 해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님도 믿고 율법도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됨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의 먹고 마시는 것은 모세 율법 가운데 정결법(레11-16장)에 나오는 식생활의 규례입니다. (레11:1-23)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법들을 지켜야 인간의 영혼이 깨끗해 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막7:1-5) 그러나 마가복음 7장 19절에서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영혼의 정결은 식생활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촉구하였습니다. 곧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수반하는 회개와 신앙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렘4:4, 롬2:28,29)
절기, 초하루, 안식일은 모두 유대인들의 성일로서 본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 기쁨을 누리는 예배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형식화된 행사의 날로 전락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절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기가 율법주의자들처럼 형식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기 때 마다 그 절기의 영적의미를 되새기고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미혹의 세력은 신비주의 이단입니다. 18절과 19절입니다. 신비주의 이단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악한 인간이 두 가지 방법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인간 속에 내재한 영혼이 하나님에게로 여행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18절‘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라는 말씀은 마음의 생각에 깊이 심취하여 하나님에게로 여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마인드컨트롤이나 밀의 종교 등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마인드컨트롤은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계속 연습하고 반복하면 내가 원하는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의 종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기도 하고 신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종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내려오신다는 사상을 전개했는데, 이 사상에서 천사숭배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심을 가르칩니다.
요즘에도 입신이나 무아지경 속에서 영혼이 하나님께 자율적으로 갔다고 올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셋째 하늘에 갔다 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무아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어 내가 원할 때 하나님의 세계에 넘나들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환상을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인간의 공로와 노력을 그리스도의 공로와 역사보다 더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주장에 미혹되지 말고 교회와 만물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확고히 다져야 합니다. (19절)
19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말씀합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게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식물이 자라는데 적절한 태양빛과 적절한 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태양빛과 적절한 물이 그 식물이 자라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영적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성장에도 빛과 물이 있어야 합니다. 6절과 7절 말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것이 빛과 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고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삶이 매일 빛과 물을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빛과 물을 이용하셔서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교회를 자라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