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18절,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모든 생물들의 육체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죽은 자를 자는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죽은 자라고 보지만 주님은 잠을 자는 자로 보십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에 대한 신비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생각할 때 출생과 성장을 생각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자랍니다. 이러한 것 자체가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더 신비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긴 잠을 자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참 생명이 육체라는 헌옷을 잠깐 입었다가 어느 순간에 그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이 육체라는 헌 옷 때문입니다. 육체라는 헌 옷은 질병에 걸립니다. 육체라는 헌 옷은 마음의 병도 들게 합니다. 사람이 이런 저런 일로 고통당하는 것은 육체라는 헌 옷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라는 헌 옷이 그런 것입니다. 자존심 문제 하나도 힘들게 하는 것이 육체라는 옷이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 받게 하는 것이 육체라는 헌 옷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이러한 육체라는 헌 옷을 벗을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새 옷을 입을 날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 잠을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곧 오늘 죽었다가 내일 다시 살아나는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단지 내게 주어진 인생이 모두 끝났을 때는 긴 잠을 자게 될 뿐입니다. 긴 잠을 잔 후에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잔다’ 라는 말에는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뜻이 이미 포함된 것입니다. 잠자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잠자는 남편, 잠자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차라리 사람은 잠잘 때, 잠자는 모습 속에서 천사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지옥갈까 걱정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진짜 죽음은 두 번째 죽음, 곧 불과 유황에 타는 못에 들어가서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을 진짜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가서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까를 걱정해도 죽는 것 자체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것은 영생의 부활을 약속받고 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고 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약속 속에서 오늘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은 부활은 약속 속에서 잠을 자게 될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위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임시적인 위안이고, 또 하나는 영원한 위안입니다.
임시적인 위안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 돈 걱정이 살면 위안이 됩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건강해 지면 이것보다 더 큰 위안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살아가면서 있어야 될 위안이고, 힘이 되는 위안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또 다른 위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위안입니다. 18절에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는 것은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말들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재림 시에 우리 몸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됩니다. 썩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몸으로 바뀝니다. 이런 말들이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슬픈 것은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평합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사실 앞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몸이 썩어 없어진다는 사실 앞에 위로가 되는 것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재림 시 바뀔 몸은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병든 몸도 없고, 연약한 몸도 없습니다. 피로해서 지치는 몸도 없습니다. 재림 시 바뀌게 될 몸은 영광의 몸이며 영원한 몸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들로 서로 위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 시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봅니다. 우리는 이런 말들로 위로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왜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몸이 부활할 것에 대한 보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재림이 없고 우리 몸이 다시 살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바로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자는 가장 영광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