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3장,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주요 특징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는 재림을 강조함에 있어 그 입장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합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4장17절에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은 성도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몇몇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지나치게 과민한 나머지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노동과 삶에서 마땅히 세워야 할 계획을 버린 채 재림만을 대망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록된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3절을 보면,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해야 하지만 현재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버지로서 역할, 어머니로서 역할, 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여러 역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역할이 있고 사회인으로서 역할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역할들을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 감당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는 성도들의 신앙에 있어 상호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막연하게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데살로니가후서의 편지내용들이 경종을 울립니다. 지금 삶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경종을 울립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세상적인 삶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데살로니가전서는 재림이 임박했음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기다리되 막연하게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에 최선을 다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막연하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도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을 감당하면서 신실하게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많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3가지 기도제목을 던지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끝으로라는 것은 편지의 결론 부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신실한 신앙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결론적인 당부의 말인 것입니다.
첫째 기도제목이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퍼져 나간다’ 라는 것은 주의 말씀이 능동적이고 활동적이어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47편15절 보면,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영광스럽게 되고’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말씀의 영향력입니다. 즉 믿지 않은 자가 믿어 구원을 받고, 믿는 자들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에 열매가 있으려면 주의 말씀이 이처럼 세력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이 세력을 얻어야 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이 세력을 얻어 퍼져 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교회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진단을 합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를 제시하라고 하면, 주의 말씀이 세력을 얻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 여러 방해의 역사로 인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 기초가 튼튼하여 지고 왕성해 지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이 세력을 얻어서 주의 말씀이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퍼져 나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곳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경험과 기술이 통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만이 실 핏 줄처럼 뻗어나가야 하고, 흘러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넘치는 교회가 됩니다.
가정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며, 또한 이 세상에 산재해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모든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실 핏 줄처럼 퍼져 나가 세력을 얻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15절을 보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집이 어떤 집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진리가 교회를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말이 세력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어야 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관한 영적진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떻게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진단결과가 무척 병이 든 상태라면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는데 시간이 걸리고, 하나님의 진리가 다시 굳게 서는데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는 더욱 굳게 설 것입니다.
둘째 기도제목은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달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고 말씀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한 사람들은 특별히 바울을 괴롭힌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의 전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방해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단순히 불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대적하고 사도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로 부터 건져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대적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믿음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부류 중에 이단세력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단세력은 기존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단들의 교리로 들어오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단세력으로 부터 성도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말씀 위에 더욱 굳건하게 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이 기도제목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미쁘사’ 라는 것은 ‘신실하사’ 라는 뜻입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의 손에 두지 않으십니다.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악한 자를 대적함에 있어 신실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세째 기도제목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장1절을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라고 말씀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길은 경주자와 같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마치는 것은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경주이며 이 경주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가서를 보면, 주님을 신랑에 비유하며 성도들을 신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부인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아가서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고 노래합니다.
아가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님의 사랑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주님의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음 같이 강한 사랑 때문에 우리 죄를 사해 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둘째,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출애굽기 34장14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사람의 질투와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상대방 보다 못하거나 어떤 시기심 때문에 질투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질투는 상대방을 죽이고 나를 죽이는 질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투는 나에 대한 절대적 사랑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질투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믿으면 모두 견뎌냅니다.
그리고 이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한 경주는 100m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 경기입니다. 100m 경주는 무조건 빨리 달려면 됩니다. 그러나 마라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주를 하기 위해서는 완급조절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몇 번의 고비를 극복해야 합니다. 특히 결승점에 다다랐을 때는 젖 먹은 힘까지 다 내어 달려야 합니다.
믿음의 삶이 그렇습니다. 한 때는 고속행진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믿음으로 몇 차례 극복합니다. 결승점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 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완주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