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장,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
3절을 보면,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신학을 하는 목적 중에 하나는 성경해석에 있어 어디까지 가고,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를 배우는 데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적용에 있어 벗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벗어나는 경우는 대개 2가지입니다.
하나는 완전히 다른 교훈을 말함으로써 벗어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식별이 쉽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서 있지 않고, 신앙의 정체성이 없으면 이런 이단교리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단은 기성 교회의 신자들에게 거짓교리를 심어 데려갑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이단교리이지만 실제 그러한 이단교리에 미혹됩니다.
또 하나는 식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면서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해석을 하는 것만 보면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유별나게 변론과 언쟁 쪽으로 몰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본문에서 말씀하는 다른 교훈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 자체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데, 이단 교단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개인적으로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변론과 언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성 교회 자체를 교리적으로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교단은 자기들의 교리가 2,000년만에 복음을 회복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의 역사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단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역사 속에서 하나의 물줄기처럼 이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단에 속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 이단교리를 식별해야 하고, 변론과 언쟁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6절을 보면,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말씀합니다. 그것은 현재 내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한 은혜가 있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대한 체험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이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맹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보게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는 죄인이다 라고 주장하자 맹인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9:25)
유대인들의 주장에는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다가 나은 사람에게는 한 가지 아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붙드는 것이 경건이며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한 가지 은혜만으로도 족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은혜를 시작으로 점점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족하는 마음이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머무르는 자세입니다.
신앙은 결코 변론이 아니며, 언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무슨 변론이 있겠으며, 언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천국이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즉 어린 아이가 도달할 수 있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어린 아이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경건입니다. 우리는 변론과 언쟁에 빠져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은혜 자체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은혜 자체를 사모할 때, 말씀을 믿음으로 받게 되고, 경건의 능력까지 생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해서도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므로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식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주님을 원망할 일이 생기고, 돈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면 경제적 형편에 따라 주님께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삶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사모하게 되고, 저 세상에서 가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사모하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돈을 사랑하면 믿음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시대 보다 돈을 우상화 하는 시대입니다. 가정에도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해 있고, 교회에도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는 설교 때 마다 하나님 믿었더니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고, 주식가격이 올라가더라는 내용으로 도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설교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 놓고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포괄적 의미에서 거짓 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경건에 머무르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아가는데 까지 나아가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멈추는데서 멈추어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고 말했습니다. (고전 2:2)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체에서 경건의 능력이 생기고, 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결코 혼잡케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사랑을 주시며,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며,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회개케 하시며,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모든 변론과 언쟁에서 벗어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