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장, 믿음의 선한 싸움
평양 깡패 중에 가장 악질이었던 ‘김익두’ 란 사람에 대한 일화는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김익두’ 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다가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술 취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기분 나쁘다며 목사님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실컷 얻어맞은 후, 김익두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는구나!” 말하였습니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자,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이 평양 깡패 중 가장 악질이었던 ‘김익두’ 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훗날 김익두 목사님을 때린 그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이처럼 삶의 방식이 바뀝니다. 그 삶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자기 주먹만 믿고 살던 ‘김익두’ 가 예수님 때문에, 얻어맞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 이 아니겠습니까?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 이란 불리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인생을 거의 마무리해야 할 노년기에 쓰여 졌습니다. 노년의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요, 복음의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가 디모데전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권면을 무척 격앙(激昻-물결이 부딪쳐 흘러 오르는 것) 된 어조로 말합니다.
우리 다함께 11절과 12절 상반절, ‘영생을 취하라’ 까지 읽겠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시작한 바울은 이제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디모데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는 것은 선지자나 중보자 등 높은 신앙 인격을 갖춘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신33:1, 삼상2:27, 시90:1)
디모데를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디모데 자신이 누군가 하는 정체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디모데는 다른 누구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은 ‘하나님의 사람’ 으로서 삶의 정체성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야 할 길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이것들을 피하라’ 는 것은 디모데전서 6장 3절에서 10절 까지 내용입니다. 이단을 경계하고 돈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단을 경계하고 돈을 사랑치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영생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척 적극적인 것입니다.
‘싸움의 기술’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맞고 사는 게 일과인 소심한 고등학생 ‘송병태’ 란 사람이 안 맞고 살기 위해 온갖 무술 책을 독파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책을 읽고 무술 연습을 해도 늘 맞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싸움의 고수 ‘오판수’ 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오판수’ 란 사람은 늘 맞고 다니는 고등학생 ‘송병태’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싸움의 고수 ‘오판수’ 가 소심한 고등학생 ‘송병태’를 지도했던 핵심은 ‘싸움의 기술’ 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핵심은 ‘송병태’ 마음 속에 있던 두려움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제거 되자, 소심한 ‘송병태’ 가 ‘싸움의 고수’ 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인 측면에서 ‘싸움의 고수’ 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무장해제(武裝解除) 시키기 위해 흔히 쓰는 방법 중 하나가 염려와 두려움을 심는 것입니다. 염려와 두려움이 들어오면 사람이 무기력해 집니다. 의욕을 상실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염려와 두려움에 빠집니다. 질병에 대한 염려, 내일 일에 대한 염려, 사람에 대한 두려움, 어떤 사건에 대한 두려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각양각색의 염려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염려와 두려움은 마치 사탄이 그 사람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혼미(昏迷)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염려라는 무기로 한 쪽 뺨을 때리며, 두려움이라는 무기로 다른 쪽 뺨을 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싸움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염려와 두려움이라는 뺨을 맞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탄과의 제대로 된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싸움이 나타나는 삶의 양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입니다. 깡패 ‘김익두’ 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후, 나타난 것이 ‘인내와 온유’ 이지 않습니다. 김익두는 ‘인내와 온유’ 가 있었기에 자기를 때린 사람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제대로 된 싸움을 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12절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당부까지 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디모데가 자신의 연소함에 대해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것뿐입니다. 즉 믿음을 포함해서 전인격적인 모든 면에서 신자들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이라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만 선한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한 싸움’ 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은 하나님 앞에서 품는 생각과 마음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의 고수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후, 그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이 세상 삶에서 어떻게 표현됩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형태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가는 나라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8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 할 시점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면 주님 앞에서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디모데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3절과 14절을 보면,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물론 우리는 아무 흠도 없고, 아무 책망 받을 일도 없이 주님 앞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흠을 남기고 있고, 책망 받을 일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것과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어떤 흠이 있는가? 어떤 책망 받을 일이 있는가?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다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15절과 16절은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 날이 어떤 사람에게는 환희(歡喜)의 날이 되겠지만, 그 날이 어떤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됩니다. ‘기약이 이르면’ 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카이로이스’ 인데, ‘예정된 때’를 의미합니다. ‘예정된 때’ 라는 것은 ‘반드시 그 날은 온다’ 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선한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주관자시며, 모든 신자들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께서 만물을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 때 까지 우리의 선한 싸움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이 세상을 떠날 시각이 가까워지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당부합니다. 우리도 역시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주님께 갈 시각이 다 되었을 때, 자녀들에게 당부해야 할 말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이 어떤 배경 속에 쓴 것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온갖 이단사상이 난무한 에베소에서 외롭게 교회를 돌보고 있는 디모데에게 주는 충심어린 조언이었습니다.
에베소는 동서를 잇는 중계무역 지역이자 바다와 육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그 어느 도시도 부럽지 않을 만큼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이 도시 전체가 물질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으며, 돈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에베소는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무역항구였기에, 도처에서 우상문화와 음란한 우상 종교가 수입되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도덕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었고, 영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에베소는 풍요의 여신 아데미 숭배로 유명했습니다. 숭배 의식의 절차 중 하나가 매춘을 제공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도시 전체에 음란한 기운이 팽배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에베소는 주변의 각 도시에서 살인, 강도, 도둑질 등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한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범죄자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러한 곳에 복음의 깃발을 꽂고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돌보는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범죄율은 작년 당시에는 세계 2위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5대 범죄가 살인, 강도, 절도, 성폭력 및 기타 폭력입니다. 지금은 특히 성폭력과 살인, 그것도 미성년자 성폭력과 살인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또한 온 나라가 음란문화로 병들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한 음란 어플도 심각한 수준이어서,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스마트 폰에는 음란어플을 차단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들과 음란문화는 경제성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했을 때는 이런 범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음란문화도 지금처럼 심각하지는 않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면서 범죄도 늘어나고, 음란문화라는 우상이 도시 한 복판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공지상주의가 만연하고 도덕성은 해이해 졌습니다.
‘선교 한국’ 이 이제 ‘에베소 한국’ 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냉철하게 살펴볼 때가 되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우리나라가 복음 수출국으로서 영적 영향력을 행사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과감하게 성공 지상주의에서 떠나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음란문화에서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부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는 것입니다.
에베소를 사로잡고 있었던, 우상과 음란문화, 그리고 황금만능주의는 거대한 바위 같았습니다. 도끼로 깨뜨려도 깨어질 것 같지 않은 거대한 바위가 에베소였습니다. 한편 디모데는 이 거대한 바위에 비하면 던지면 깨어지는 계란과 같은 존재입니다. 더구나 디모데는 몸도 약했습니다. 위장병을 포함해 다른 병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명령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처음에는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표가 됩니다.
에베소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 갔습니다. 매춘과 우상의 도시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적 부흥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에베소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곳에는 성모마리아 교회가 있고 사도 요한의 교회도 있고 사도행전의 저자인 성 누가의 무덤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지 중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이 성지 중의 성지가 된 이유를 사도행전 19장 20절에서는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디도데 한 사람은 연약합니다. 던지면 깨어지는 계란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흥황하여 세력을 얻는 힘이 있습니다.
디모데 한 사람은 단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뿐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디모데를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강력한 주의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다는 말씀은 에베소와 아시아 각지 구석구석으로 퍼진 죄와 우상의 문화를 태워버리고 삼켜버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누가와 바울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녹아내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말씀 합니다.
주의 말씀은 실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해저 지진과도 같습니다.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발생한 힘이 저 멀리 아프리카 동쪽 해안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주의 말씀은 두란노에서 시작되어 에베소를 삼키고 전 아시아를 변화시켰습니다. 다른 점은 해일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변화시킨다면, 반대로 말씀은 죽어 있는 모든 것을 생명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립니다. 교회가 살아나면 이 나라가 살아납니다.
말씀의 힘이 이 천년 전과 지금이 다른 것입니까? 초대교회시절에만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했습니까?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한 것처럼 그의 말씀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우리는 21세기 에베소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물질과 쾌락과 음란의 아데미 신상을 세워놓고 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말씀으로 매인바 된다면 이러한 조류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다면 이러한 조류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대의 에베소 도시 한 복판을 하나님의 성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성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