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창세기

창세기 1장,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영구한도성 2022. 7. 16. 00:5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전체의 대전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전체의 뿌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태초에’ 라는 것은 시간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 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이 때 부터 시간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도 ‘태초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 아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는 것은 영원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영원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는 질문들에 대한 모든 해답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말하며, 사후의 세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의 말씀이면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 무엇보다 성경은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며,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시작하는 첫 절에 기록한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믿고 알아야 할 것은 어떻게 천지가 생겼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선포하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모세오경이 있고, 여러 선지자들의 책이 있으며, 복음서가 있으며, 서신서들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다른 성경들은 동시에 영적의미를 상실합니다.

 

우리는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을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믿고, 선지자들의 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이 모든 믿음에 근간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우리가 듣고 있는 것, 우리가 냄새를 맡고 있는 것,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 이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본인이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길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에게는 하늘을 보고 감사의 마음이 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 하늘이 자기 인생에 대해 무심한 하늘로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같은 하늘을 보고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도 없습니다. 같은 하늘인데, 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은 감사의 마음이 들지만, 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별 생각이 없습니다.

 

창조의 과정을 보면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습니다. 이 빛은 태양과 같은 발광체가 아니라 모든 창조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빛입니다. 둘째 날,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궁창은 창공이라고도 합니다. 창공 위에 물이 있었고, 창공 아래에도 물이 있었습니다. 셋째 날, 하나님은 땅, 바다, 풀, 씨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 하나님은 해, 달, 별을 만드셨습니다. 다섯째 날, 하나님은 새와 바다의 생물을 만드셨습니다. 여섯째 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첫째 날 부터 셋째 날 까지 창조된 것은 넷째 날 부터 여섯 째 날 까지 창조된 것의 배경 혹은 무대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날 빛은 넷째 날 해, 달, 별의 무대가 됩니다. 둘째 날 궁창과 물은 다섯 째 날 새와 바다의 생물을 위한 무대가 됩니다. 셋째 날 땅, 바다,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여섯 째 날 사람을 위한 무대가 됩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첫째 날 빛은 모든 창조물의 근간이 되는 것이며, 마지막 날 사람이 창조된 것은 창조의 구심점이 사람을 향해 있음을 말합니다. 주인공은 가장 마자막에 나타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마지막 날 사람창조를 염두하고 창조의 역사를 진행시킨 것입니다. 여섯 째 날 사람창조를 위해 다섯 째 날 까지 밑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이 세상에 두심으로 인류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인류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하면 하나님의 섭리로 봅니다. 섭리라는 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도 하는데, 인류역사를 진행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경륜이라고 합니다.

 

섭리라는 것은 보편적 역사에 대한 섭리가 있고, 개인적 역사에 대한 섭리가 있습니다. 보편적 역사라 하면 민족의 역사나 국가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테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한민족의 역사가 보편적 역사입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 고 말씀합니다. 즉, 인류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란 말씀입니다.

 

이처럼 보편적 역사에 대한 섭리가 있는가 하면, 개인적 역사에 대한 섭리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이 부르심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적 역사에 대한 섭리입니다. 한 개인을 어쩌다가, 우연하게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부르심은 한 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부르셨다면 지금과 앞으로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르심은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부르심이란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각자 자기 활동을 하다가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부르면 한 자리에 집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신호가 왔기 때문에 얻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신호가 있어서 오게 된 것입니다. 오게 된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입니다.

 

사람마다 그 신호가 다르고, 그것을 듣는 삶의 정황들이 모두 다릅니다. 동일한 것은 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이렇게 모여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인도하십니다. 인류의 역사를 당신의 경륜에 따라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사도 당신의 경륜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불신자와 믿는 사람의 차이점이 있다면 불신자는 내 인생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믿는 사람은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예배의 자리는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앞으로 한 주간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겠다는 고백의 자리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 그 배경에는 어떤 신앙이 깔려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 외에 내 인생이 하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서 발생하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재촉을 하고, 줄달음질(단숨에 내처 달리는 달음박질)을 친다고 해도 하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스스로 줄달음질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내 인생에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가를 살피며 그것을 보며 따라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에 전능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고 말씀 하십니다. KJV성경(King James Version)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는 말씀이 “I am that I am.” 으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내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존재의 원인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그 원인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존재의 원인이 나 밖에(out) 있습니다. 즉,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존재케 하는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공기를 통해 숨을 쉬어야 존재할 수 있고, 중력이 있는 지구 위에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물과 빛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물과 빛도 스스로 존재 할 수 없습니다. 물과 빛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모체가 있어야 합니다. 태양이라는 발광체가 존재하려면 공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별과 행성사이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별이 존재하려면 공간과 더불어 다른 별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피조세계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음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피조세계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른 그 무엇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자체가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이미 존재하고 계신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시간도 없고, 공간이 없어도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피조세계가 존재하는 가장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란 존재가 이 세상에 있게 된 가장 궁극적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1장5절을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된 사실이 결국 존재에 대한 궁극적 해답입니다.

 

내 육체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내 영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이가 부모님이라고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유교적 사고방식 속에 ‘자기 몸을 해치는 것은 부모에게 불효를 하는 것이다.’ 는 것이 있습니다. 맞는 말인데, 불효이기 전에 자기 몸을 해치고, 자기 영혼을 해치는 것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죄에 속합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존엄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경제적 배경이 무엇인가? 뼈대 있는 가문인가 아닌가? 에 따라 존엄성에 차이가 나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존엄한 것입니다.

 

건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잘 났다는 교만이 아닙니다. 존엄성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열등감은 비교의식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서로 비교하는 존재로 짓지 않았습니다. 한 명 한 명 존엄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둘째,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8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말씀합니다.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이며,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끝 글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은 ‘하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다.’ 는 말씀입니다. ‘처음이자 나중이다.’ 는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 그 자체이다.’ 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개념은 인간의 시간개념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이 아닙니다. 영원 속에 내포된 영원한 현재의 개념입니다.

 

우리에게는 천지창조의 역사가 과거의 일이고, 주님 재림이 미래의 일이지만,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는 이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속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현재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이시므로 우리의 인생을 꿰뚫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믿고 맡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양심이 증명한다는 말씀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양심이 창조주 하나님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양심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위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피조세계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불행합니다.

 

불행의 상태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장 2절에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무질서’ 를 의미합니다. 이집트에서는 ‘비존재’ 라는 개념도 사용하는데, 무질서도 ‘비존재’ 의 개념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구별되지 않았으며, 어떤 기능도 부여받지 않았기에 무의미한 상태를 말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깊음 속에 깊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빛이 전혀 없는 세계의 표상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마치 이와 같이 됩니다. 무질서해지고 무의미한 존재가 됩니다. 그 심령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됩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없는 모든 사람의 삶이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의 움직임을 말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천지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움직임을 알립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사람이 빛의 세계로 나오려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곧 하나님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절의 하나님의 영을 ‘바람’ 이라고도 번역되는데, 바람으로 번역될 때 히브리어 단어는 ‘루아흐’ 곧 성령의 바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동참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은 창조주시다는 것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령은 빛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끕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영혼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빛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심령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을 때,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에서 많은 결핍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를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궁창을 만드시고,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풀, 씨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만드시고, 해, 달, 별을 만드시고, 새와 바다의 생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궁창을 띄우시고, 하나님은 그 궁창에서 해, 달, 별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뭇별을 보여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뭇별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큰 기대를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