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6장,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영구한도성 2022. 7. 30. 21:19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祈禱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9 After this manner therefore pray ye: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히브리서 11장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가져야 할 두 가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서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면서 자란 사람인 경우, 하나님을 믿더라도 상 주시는 이로 잘 믿지 못합니다. 벌을 주시는 분,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기도문 중에서 첫째 문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기도를 드리기 위한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히브리서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즉 이후 이어지는 주기도문의 내용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대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이 후 모든 기도의 내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 죄 사함을 위한 기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모든 기도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드립니다. 나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기도를 합니다. 환우들을 위해서, 풀리지 않는 여러 인생문제에 대하여... 여러 내용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기도와 간구에 대한 선행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진심어린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매일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내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아플 때, 하나님도 나의 아픔을 알고 계시겠죠? 라며 하나님께 속삭여야 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근심하고, 탄식하고 계실 것을 생각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만일 나에게 이런 고백이 없고,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 삶 가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분의 인격을 믿고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공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단도 피조세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오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사단은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해야 합니다. 시편9편 10절을 보면, 시편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노래합니다.

 

주를 찾는 자들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는다는 고백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점에서는 사단과 그리스도인은 전혀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사단과 그리스도인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하지만 사단은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제 이름은 제 가족과 여러분도 알고 제 친구들도 압니다. 학교 동기들과 선, 후배들도 제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서는 제 이름 석자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만일 제 두 딸이 제 이름, 곧 아버지로서 제 이름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다면, 저는 무척 낙담이 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는 일을 했는가? 아니면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켰는가?” 여러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로서 저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로서 제 이름이 신뢰받지 못한다면, 목사로서 그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 자체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부르는데,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고 부르는 사람에 대해서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랑과 공의를 신뢰하고 부르는 사람에 대해서만 기뻐하십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부르는 사람에 대해서만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무엇입니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람을 부르기 위하여 이름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즉 이름이라는 것은 호칭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한 마디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엘로힘’ 곧 ‘전능자’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고 말씀한 적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오직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요.” 라고 요청하였을 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이냐?” 말씀하셨습니다. (요 14:9, 표준새번역)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어떻게 남아 있습니까? ‘여호와’ 입니까? ‘엘로힘’ 입니까? 아니면, ‘기묘자’ 입니까? ‘임마누엘’ 입니까? 사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문자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삶 속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를 제발 믿으라.” 속삭이듯, 애절하게 찾아오시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사랑하시는 이에게 잠을 주시는 하나님, 세상의 모든 걱정근심을 잊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의 이름은 문자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이름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최종적으로 보여 주신 장소는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그 분은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또는 ‘엘로힘’ ‘기묘자’ 라고만 알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의 전도를 받을 때, 공격하는 말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도 하나님 이름 안다.” “성경은 읽을 만큼 읽어 보았다” 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성경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성육신 하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해박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삶 속에서 경험했던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생수를 구했던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했던 이방인 백부장도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것이 신앙적인 고민이기도 하고, 삶 자체에 대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때 마다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의 인생을 통해 모두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고민 중 많은 것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5) 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7:13) 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내 욕심 때문에, 내 야망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 고집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후회함이 없는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가장 안전한 인생, 최후의 상급이 있는 인생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삶의 푯대가 되는 인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 따라 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든, 좁은 길이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길을 가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라고 한 길을 순종하여 가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가장 잘 아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만’ 나타내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사람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삶 속에서 체험하고 알게 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오해를 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없고 하나님만이 홀로 존재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고 타락하였을 때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 불신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 부터 영원 후 까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고, 아무런 피조물이 없어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기도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해 주는 기도입니다. 성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마다 내가 사악한 죄인임을 깨닫나이다.”

 

그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이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21세기는 인류역사에 있어 과학문명의 혁명적 시기라고 합니다. 특히 컴퓨터공학과 생명공학의 발전은 하루하루가 다릅니다. 과거 500년이 걸려야 되는 인류역사의 변화가 지금은 5년 내외의 기간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5년 보다 더 짧아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21세기의 사람들은, 과학문명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의 영역에 까지 도전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과학문명입니다.

 

현대인의 심리 속에는 인류를 대단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심겨져 있습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주기도문의 첫 번째 문장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가 어떤 의미로 와 닿겠습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러 줄 때, 교만한 현대인들이 우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섬겨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얘기를 들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노아의 홍수시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홍수시대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어떤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은 그 시대의 문화와 문명을 누리기만 했을 뿐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 그 시대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 모두를 하늘의 창을 여셔서 수몰시켜 버렸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지혜롭게 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는 노아의 홍수시대를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집니다. 이 시대의 모든 문화와 문명이 사라집니다. 호화찬란한 예배당 건물도 모두 사라집니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가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였듯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방주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여도, 저와 여러분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주입니다.

 

급속한 과학문명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우상인 이 시대 속에서, 인간과 거의 흡사한 로봇이 등장하여 사람의 일까지 하는 이 시대 속에서, 그리고 돈이면 다 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낮아지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는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하는 현대사회 속에서도,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 신앙의 배를 바로 잡아주는 키입니다.

 

내가 교만 속에 있을 때,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삶의 목적을 놓쳤을 때,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모를 때,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면서, 신앙의 배를 타고 간다면 우리가 탄 배는 전복되거나 잘못 될 리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 신앙 삶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가장 안전한 배를 타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지만, 우리는 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생각하며 나의 기도와 여러 간구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나의 기도와 간구들 중 그 내용이나 마음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벗어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벗어나 있다면 나의 기도와 간구들에 대해서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기들의 이름이 영광받기를 원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 속에 축복이 있고 이 기도 속에 평안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가 진심에서 나올 때, 그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육체가 누구의 이름 때문에 존재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존재합니다.

내 영혼이 누구의 이름 때문에 존재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의 건강도 아버지의 이름 때문이며, 내 삶의 모든 여정이 아버지의 이름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입술로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의 삶을 통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