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7장, 비판하지 말라

영구한도성 2022. 7. 30. 21:26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2 For with what judgment ye judge, ye shall be judged: and with what measure ye mete, it shall be measured to you again.
3 And why beholdest thou the mote that is in thy brother’s eye, but considerest not the beam that is in thine own eye?
4 Or how wilt thou say to thy brother, Let me pull out the mote out of thine eye; and, behold, a beam is in thine own eye?
5 Thou hypocrite, first cast out the beam out of thine own eye; and then shalt thou see clearly to cast out the mote out of thy brother’s eye.
 

 

1 批判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批判하지 말라
2 너희가 批判하는 그 批判으로 너희가 批判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兄弟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兄弟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外飾하는 者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後에야 밝히 보고 兄弟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는 말씀은 고대 항구도시에서 사용했던 무게를 재는 저울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당시 저울은 지렛대의 원리였습니다. 이를테면 아이가 시소를 타려면 엄마는 시소의 앞쪽에 아기는 시소의 뒤쪽에 타야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같은 위치에서 균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체중이 같은 사람이 시소에 타야 합니다.

그래서 고대사회의 저울은 양팔저울의 모양을 갖춘 것이 많습니다. 양팔저울은 지렛대의 중앙을 받침점으로 하고, 양쪽의 똑같은 위치에 접시를 매달거나 올려놓습니다. 한쪽 접시에는 측정하고자 하는 물체를, 다른 한쪽에는 분동을 올려놓아 지렛대가 수평을 이루도록 합니다. 그 분동의 질량이 바로 물체의 질량이 됩니다. 분동은 무게의 표준으로서 다른 한쪽 저울판 위에 올려놓는 추(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한 톨의 보리를, 고대 중국에서는 한 톨의 쌀을 무게의 기준으로 삼는 분동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사회의 원리 중 하나가 준 대로 받는 것인데, 그것은 저울처럼 균형을 향해 나아갑니다. 결혼식을 치루면 축의금 액수를 기록해 두고, 장례식을 치루게 되면, 부조금 액수를 기록해 두지 않습니까? 다음에 상대방에게 축의금이나 부조금을 전달하고자 할 때 참고자료가 기록해 둔 그 장부입니다. 5만원을 받았다면, 5만원을 전달하고, 10만원을 받았다면 10만원을 전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누가복음 6장31절을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고 말씀합니다.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면 내가 그 사람을 먼저 대접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내가 상대방을 푸대접하게 되면 나도 그 사람으로 부터 푸대접 받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은 내가 비판하는 그 정도의 양 만큼 내가 비판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이유는 내가 의롭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렸고, 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은 잘못을 범했으며, 나는 일을 잘하지만, 다른 사람은 일을 잘 못하고,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나만큼은 모르고, 나는 억울한데, 다른 사람은 억울하지 않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나’ 중심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있는 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합니다. 들보는 영어성경에서 beam(KJV), 혹은 plank (NIV)라고 번역합니다. 빔은 건축물에 쓰이는 목재 빔과 같은 것이고, plank는 널빤지를 말합니다. 빔이나 널빤지는 아예 눈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눈 속에 있는 이렇게 큰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는 예리하게 발견해 냅니다.

사람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스스로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모든 의를 내려놓을 때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기를 조명해 주셔야만 그 들보가 보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데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 없습니다. 아주 쉽게 찾아내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현미경처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있는 약점과 허물은 아무리 큰 것이라고 해도 잘 보이지가 않고, 상대방에게 있는 약점과 허물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고 해도 잘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이 되려면 다른 사람의 티 보다는 자기의 들보를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약점이나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약점과 허물이 있되 그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명언 중에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 있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두 배 하라는 뜻입니다.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두 배 하는 사람이 사람사이의 관계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성숙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상담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상담자가 피상담자의 이야기를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이 자세는 무척 중요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들어주고,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말을 들어주고,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님들 상호간에도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관계성이 될 때 좋은 관계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쉬지 않고 말하는 기도 보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기도입니다. 듣는 기도를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주장을 펼치려 하기 보다는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왜 읽습니까? 내 생각을 합리화할 구절을 찾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기 위해 읽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부터 말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상대방의 티보다는 자기의 들보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내려놓게 되고 자기의 죄악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 는 ‘위선자’ 혹은 ‘겉치레만 하는 사람’ 을 말합니다.

믿음 없이 율법만 지키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사람이 ‘외식하는 자’ 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실제로 하는 행동은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면서 주일예배만 잘 지키면 된다는 사람들이 ‘외식하는 자’ 입니다.

우리는 ‘외식하는 자’ 가 되어서는 안 되고 ‘믿음 있는 자’ 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가기 위해서도 믿음이 있어야 하듯이 나의 들보를 깨닫는데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티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나의 들보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는 말씀이 받은 데로 갚게 되는 저울의 원리이듯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선행에도 저울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잠언 19장1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선행을 저울에 달아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비판하려는 말과 마음을 피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마음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에게 잘 해 준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 잘못한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누가복음 6장32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결론적으로 비판을 하게 되면 비판받습니다. 상대방을 헤아리게 되면 자신도 헤아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세워주면 나도 세움을 받고, 상대방을 칭찬해 주면 나도 칭찬을 받게 됩니다. 더구나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나의 들보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오히려 하나님은 나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로마서 13장8절을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사람을 비판하거나 사람을 원수로 삼게 되면, 그에 상응한 부담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지만, 상대방에게 사랑의 빚을 지게 만들면 사랑으로 보답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