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아브라함의 믿음
여기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18) 란 말의 헬라어 원문은 ‘소망을 거스려서 소망에서 믿었으니’ 란 의미입니다. 첫 번째 언급된 소망은 인간적이고, 육적인 소망입니다. 세상적인 소망입니다. 이것은 모태에서 물려받은 소망입니다. 두 번째 언급된 소망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영적인 소망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거스려서 소망에서 믿었으니’ 라는 의미는 인간적이고, 육적인 소망을 거스려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영적인 소망 가운데서 믿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정의해 보면, 날마다 이 세상의 소망을 거스려서 영적인 소망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이고 육적인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적인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 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육적인 소망을 거스려서 영적인 소망, 곧 하나님나라를 쫓아간 것입니다.
영적인 소망, 곧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쫓아갑니까? 믿음으로 쫓아갑니다. 히브리서 11장8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말씀합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고 기다림으로써 그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을 때, 순종하여 간 것은 행동을 통해 그 믿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한편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한 것’ 은 믿고 기다림으로써 믿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두 가지 믿음 속에 살고 있습니다.
행동해야 할 믿음이 있고, 믿고 기다려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교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소명을 주셨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다려야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다 살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은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내게 어떤 고난이 있다면 그 고난을 인내로 극복하는 것은 믿고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나에게 있는 어떤 간구와 기도제목이 실현되는데도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행동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던, 믿고 기다림으로써 믿음을 증명하던,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조상 때부터 살던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자기 나이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인 갈등과 의심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조상 때부터 살던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떠나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나이 늙어 자식을 본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그렇게 힘들게 낳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 날 밤, 잠을 잘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20절을 보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 졌다.’ 말씀합니다.
견고하다는 것은 ‘굳고 튼튼하다’ 는 것입니다. 마치 흙을 다진 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흙이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흙을 다지는 것은 마치 인간적인 번민과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극복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시간이 지나면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더 없이 큰 확신에 휩쓸리다.’ 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전 속력을 다해 돛을 높이 들고 항구로 진입해 들어오는 배를 두고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항구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심과 공포의 바람이며, 유혹의 바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항해사로,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의 나침반과 해도로 삼은 아브라함은 능히 그 항구로 들어왔습니다. 위대한 모험가처럼 모든 돛을 높이 매달고 거센 바람을 이기고, 목적지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능히 이루실 줄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줄을 믿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이 세상 삶을 다 살고, 늘 환난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 삶을 다 살고, 결국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산모 우울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아이가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막막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상은 비록 험하지만 내가 낳은 아이가 내가 걱정한 것 보다는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막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능히 최종 목적지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록하면서, 로마서의 핵심사상 중 하나인 ‘칭의’ 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22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말씀합니다.
‘칭의’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칭의’ 라는 것은 법률적 용어입니다. 죄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 하는 것입니다. 멸망 받아야 할 죄인(罪人)이 변하여 실제로 허물이 없는 의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질상 아직도 죄인이지만 믿음을 보시고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는 신자를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도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 한 것은 도덕적으로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사람 됨됨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선언합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비록 죄와 허물이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고향을 떠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가장 큰 축복은 실제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칭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많은 번민과 갈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됩니다.
세상법정에서 무죄선고를 받지 못하면, 징역을 선고 받거나 심각한 경우 사형선고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지 못하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됩니다. 그것도 영원한 형벌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그러한 형벌을 면하고 하나님나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말씀하십니다. (마11:11)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엄청난 일을 감당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의 사건 보다 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서 크게 쓰임 받는다 해도, 쓰임 받은 그 사실 보다 나를 의롭다고 불러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23절과 24절 상반절을 보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24절 하반절과 25절을 보면,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실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시는 ‘칭의’ 의 원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16-17)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육적 소망을 거스려서 하나님나라의 영적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사라의 태에서 언약의 아들 이삭을 탄생시킬 하나님을 믿었듯이, 오늘날 우리는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으로부터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죽은 자의 부활은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습니다. 바라지도 않을 뿐더러 바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모든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버리고, 바라고 믿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바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좌절합니다. 믿음이 연약해 집니다. 때로는 내가 믿는 것이 다 거짓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 믿음이 다져져야 합니다. 또 우리는 죄와 허물을 남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죄와 허물을 시인하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칭하십니다.
칼빈은 ‘믿음이란 나의 가슴 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믿습니다.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칭의’ 는 ‘다시 태어남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까? 하나님자녀의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자녀의 신분답게, 성령의 사람답게 그 모습을 갖추어 가게 만드십니다.
저는 청년시절까지 몸이 너무 약했습니다. 체중이 불과 40kg이었습니다. 저는 저체중으로 인해서 심한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소망이 있었다면 살이 찌는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기도제목 역시 그것이었습니다. 공부는 못해도 살만 찔 수 있다면 한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입맛이 생기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진주성찬을 차려 놓아도 숟가락을 잘 들지 않던 제가 밥과 김치만 있어도 식사를 맛있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2개월 만에 체중이 20kg가 불어 60kg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 가정에 환난이 닥치면서 신경을 너무 써서 다시 살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 다시 살이 쪘고, 교회를 옮길 때 마다 찌기 시작했고, 대구영락교회에 와서는 4kg가 더 쪘습니다.
저는 이런 과정 속에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입니다. 제가 몸이 무척 약할 때는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몸이 좋아진 것도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십니다. 몸을 약하게 만드신 것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함이고, 몸을 좋아지게 만드신 것도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손길 속에 인정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전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인정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능히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인생이라는 큰 바다에서 목적지를 잃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삶은 가급적이면 고난이 없으면 좋고, 자연인으로서의 삶은 가급적이면 행복하게 살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고난이 필요하다면 그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적인 행복의 차원이 아니라 축복의 차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은 주님을 믿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복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축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행복은 무척 애를 써야 얻을 수 있지만,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면 됩니다. 비록 우리에게 삶의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능히 그 고난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앞서 가십니다.
구원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구원 뿐 만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바랄 수 없는 상황만 바라보며 우리는 낙심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 하나님을 믿게 되면,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13장11절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보내는 순간순간은, 그 시간들은 무의미한 시간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구원은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운 시간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기를 겪을 때 마다, 내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듯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서 있다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며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