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장, 그리스도와 연합
최초의 사람 아담은 범죄로 인해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본래의 자기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던 모습입니다. 그러나 범죄 후 자기의 모습을 잃자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담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 부끄러움을 가려줄 옷이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이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인간사회의 비극이 이것입니다.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여 숨어살게 된 것이 인간사회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여 다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 치마를 벗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는 이 치마를 벗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성이 어떤 음성입니까? 그것은 내 스스로를 감추려고 하는 치마를 벗기려고 하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자는 옷을 입고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벌거벗은 자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사는 길입니다.
몇 년 전 가족상담소 소장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어떤 아이를 상담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의 가정얘기를 들어보면 믿기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내를 구타하는 폭력남편입니다. 그런데 구타가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반항도 하였지만, 세월이 지나자 적응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항상 저녁식사 후에 구타가 이루어지는데, 구타하는데는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유일한 이유는 구타할 시간이 되어서 구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타가 이루어질 때는 때릴 매를 아이들이 가져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웃집의 어떤 사람이 구타하는 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고를 받고 경찰이 들이 닥쳤을 때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이 뿐만 아니라 아내마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이불을 덮고 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몸에 피멍이 든 것 보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남편으로서 살지 못하고 있고, 아내가 아내로서 살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더구나 자기 어머니가 맞을 매를 가져오는 아이들에게서 자식으로서의 모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가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많은 현대인이 이처럼 자기의 얼굴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악마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신분에 맞는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그 심령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다워야 하고, 아내는 아내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백성다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심령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심령이 천국이 되지 못하면, 내가 속한 가정이 천국이 되지 못하고, 내 가정이 천국이 되지 못하면, 내가 속한 교회가 천국 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든 세상사람들은 영적인 정신병자입니다. 그러므로 치료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고, 가정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며, 이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고민과 갈등의 해결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1절에서 3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땅에 묻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이처럼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은 첫 번째 사건을 경험했고 예수와 함께 땅에 묻힌 두 번째 사건을 경험했으며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새 생명을 얻는 것은 내가 죽어 미래에 경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과거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죽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죽었던 사람입니다. 2000년 전에 땅에 묻혔던 사람들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 안에서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또다시 죽음에 대해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새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을 경험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례식장에 가서 왜 슬피 울며 곡을 하지 않고 찬양을 부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었었기에 죽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 해도 내가 얻은 새 생명, 하늘나라 생명과 바꾸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실제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아내를 구타하는 가정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라는 단어에는 ‘구속’ 이라는 말과 ‘구원’ 이라는 말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값으로 산 것을 ‘구속’ 이라고 합니다. ‘구속’ 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 ‘죄사함’ 입니다. ‘구속’ 곧 ‘죄사함’ 에는 우리의 역할이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게 된 사건입니다. ‘구원’ 은 예수의 새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마치 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탯줄이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아이는 탯줄을 통해 모든 것을 합니다. 아이는 엄마 배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는 탯줄을 통해 숨을 쉬고, 영양분을 섭취합니다.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는 탯줄을 통해 엄마에게 무언가를 전달합니다. 엄마는 탯줄을 통해 아이를 느끼고 경험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주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주님과 나 사이에 탯줄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숨을 쉬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님으로 부터 무언가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님께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님께서는 나의 작은 신음소리까지도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을 “내 영혼이 건짐받았다.” 라고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구원’ 은 생명의 주님과 연결되어 끊임없이 관계성을 맺고 있는 지금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러므로 ‘구원’ 은 이 땅에서 생명의 주님과 연결된 탯줄을 통해 열심히 숨을 쉬고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동적인 것입니다. 현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고 미래에 계속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삶이라는 것은 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이에 박힌 활자가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에 대한 자세도 동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공중에 잠시 떠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로 힘차게 상달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업성공을 통해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업실패를 통해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가정문제 속에서도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슬픔과 역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 시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부모 없는 고아와 같다고 한탄합니다. 시인은 많은 적들이 나를 에워싸서 죽이려 한다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죄로 인해 절망하면서 자기 영혼의 곤고함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이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하소연합니다. 왜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라는 의문을 하나님께 제시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극심한 공포심 속에, 가난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짖기도 합니다. 이것이 시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불렀던 찬송가가 시편 찬송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삶의 사건 속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개인의 삶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시편 말씀은 인생이라는 것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관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의 삶의 역사 속에 이런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굴곡이 있는 삶의 여정 속에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인 것을 노래해야 합니다.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의 인생이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져서는 안 됩니다. 가난과 절망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공포심도 어떤 외로움도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구타하는 그 폭력남편의 가정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라면 바뀌어야 할 가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2000년 전에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현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본래의 모습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살지 않는 사람들은 갈수록 자신을 위장하면서 살아갑니다. 스스로 자기를 속이면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제대로 자기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두꺼운 자기만의 옷을 입습니다. 때로는 자기를 가리는 것만으로 되지 않아 아예 모습을 바꾸기도 합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성형수술을 왜 합니까? 물론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자신감을 얻기 위해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일단 자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성형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외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아에 대해 건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교만하든가 열등감이 있든가 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죄의 뿌리를 교만이라고 했고, 어거스틴은 죄의 뿌리를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교만과 정욕이 뿌리 뽑힐 때 건강한 영적자아상이 정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입히려고 하는 모든 종류의 교만과 정욕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가 남여간의 불륜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랑을 다룬 드라마가 히트쳤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왜곡된 사랑에서 스릴을 느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세계타이틀 매치를 하는 권투가 인기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은 푹신한 장갑을 끼고 때리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합니다. 거의 싸움 수준인 격투기를 봐야 만족합니다.
불륜과 잔인함 속에서 스릴을 만끽하고자 하는 죄성은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정도가 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륜과 잔인함은 사람들이 입고 있는 또 하나의 옷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 정욕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진솔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라는 말씀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선포해야 할 말씀이며, 행사되어야져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선포는 공예배의 자리에서 선포될지라도 이 말씀의 행사는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