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창세기

창세기 1장,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영구한도성 2022. 7. 16. 01:21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에 가장 존귀한 존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땅의 짐승이나, 바다의 물고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영어성경(킹제임스버전(KJV))에 의하면, 형상은 image로 되어 있습니다. image라는 것은 겉모습과 속모습을 뜻합니다. 즉 사람은 겉모습과 속모습이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았습니까?

 

첫째는, 사람은 ‘영’ 이신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라고 할 때, ‘영’ 으로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영' 이라는 것은 영어성경에서 spir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spirit은 ‘정신, 영혼’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하나님을 가리킬 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원 그 자체’ 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나’ 계십니다.

 

사람은 ‘영’ 이신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사람은 영적존재입니다. 사람이 영적존재라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영원 그 자체’ 이시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영원 그 자체’ 이시고 ‘어디에나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 그 자체’ 가 아니라면 기도할 필요가 없고, ‘어디에나 계신’ 분이 아니라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의사소통은 대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의사소통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영적존재이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그 자체’ 이시기에 영적 존재인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은 이 세상일에 대해서 하나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로 와 닿습니까? 우리는 그 일들 앞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기쁘다고 생각하는 일이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슬프다고 생각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영원 그 자체이신 하나님만이 내게 좋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 한없는 겸허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지켜봐야 합니다. 내가 피조물인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 한없는 겸허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없는 겸허함을 가진 사람은 순간순간을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한없는 겸허함을 가진 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사람은 의로우시고, 진리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의’ 는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입니다. ‘진리’ 는 ‘참된 이치’ 를 뜻합니다. ‘거룩’ 은 ‘구별되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옳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참된 이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된 분이십니다. (벧전1:16)

 

에베소서 4장 24절을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 잃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의, 진리, 거룩’ 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 진리, 거룩’ 이 상실된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 진리, 거룩’이 회복되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태어납니다. 그 숙제를 어디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숙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린 옛 사람은 모두 거짓된 모습입니다. 추악한 모습입니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는 지옥은 옛 사람 곧 거짓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셋째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과 8절을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절대적 사랑 곧 아가페를 말합니다. 아가페가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TV드라마를 보면,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아름다운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진리이시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은 이러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후 이러한 형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말씀합니다.

 

우선 사람은 땅의 흙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근원은 비천하지만 그 구조는 오묘하다는 것입니다. 그 근원이 땅의 흙이기에 비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기에 오묘합니다.

 

인간은 티끌, 땅 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티끌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2장 6절을 보면, 이 티끌은 마른 티끌이 아니라 지면에서 올라온 안개로 축여진 젖은 티끌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금가루, 진주가루, 또는 다이아몬드 티끌이 아니라 땅의 먼지와 같은 흔한 티끌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흙에 속한 자’ 곧 ‘티끌’ 이라고 불리어집니다. (고전15:47)

 

시편 139편 15절을 보면,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노래합니다. 여기서 은밀한 데, 땅의 깊은 곳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태를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태를 ‘땅’ 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땅과 부모님 그리고 육신을 입고 있는 ‘나’ 라는 존재는 깊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람이란 존재의 그 근원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부를 잘 한다고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돈을 잘 번다고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권세가 있다고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출세를 했다고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랑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땅의 티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의 티끌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땅의 티끌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서 태어나지만,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을 입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 역사에 대해서는 ‘만드셨다’ 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해서는 ‘지으셨다.’ (formed) 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정확하고 정밀한 계획에 따라서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과정을 보면, ‘빛이 있으라’ ‘물과 물로 나뉘라’ ‘뭍이 드러나라’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이처럼 한 마디의 말씀으로 단번에 창조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으라’ 함으로 세상에 사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된 세계의 흙을 이용해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시간을 들여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영혼이 고상한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말씀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늘의 생기로 부터 기원되었으며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그 유래가 하늘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땅의 것에 집착한다든가 세상 일만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쌍한 일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그 육체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전12:7)

 

우리가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 육체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내 영혼의 유래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 시니라.” 말씀합니다. (마 23:9)

 

그리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은 생기를 거두어 가시면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됩니다. 단지 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나의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께 위탁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진흙집에 거하며, 진흙덩이 속에서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없다면 사람은 무가치하고,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없다면 사람은 진흙이며, 안개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모두 얻었다고 해도 그 영혼이 멸망 받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하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사람을 하나의 소우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의 우주와 같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이렇게 창조된 사람이 세상을 얻는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소우주로 창조된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해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진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짓고 계십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존재목적입니다. 사람은 존재목적은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존재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동시에 사람의 행복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살거나, 사람 보기에 좋은 존재로 살아서는 안 된다. 남편이 보기에 좋은 존재, 아내가 보기에 좋은 존재, 친구 보기에 좋은 존재, 회사 동료들 보기에 좋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기에 좋은 존재로 사는 것 안에 사람의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기에 좋은 존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다스리며 살아갑니다. 여기에 사람의 행복이 있습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영적질서입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늘에서 비롯되었기에 위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만물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만물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돈’ 이라는 것도 하나의 피조세계입니다. 사람은 돈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돈을 다스린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며,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초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결국 흙이며, 안개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기를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은 엄밀한 의미에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이 땅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축복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 때문입니다.

 

현재 LG전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금성사에서 무척 오래 전에 히트 쳤던 광고 중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잘 선택한 전자제품으로 인한 만족이 10년 간다는 말입니다. 결혼에 있어서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배우자를 살 선택하면 그 만족이 평생 갑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택은 영원을 좌우합니다.

 

잘못된 믿음, 잘못된 종교에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