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로마서

로마서 8장, 장차 나타날 영광

영구한도성 2022. 8. 3. 23:52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18 For I reckon that the sufferings of this present time are not worthy to be compared with the glory which shall be revealed in us.
19 For the earnest expectation of the creature waiteth for the manifestation of the sons of God.
20 For the creature was made subject to vanity, not willingly, but by reason of him who hath subjected the same in hope,
21 Because the creature itself also shall be delivered from the bondage of corruption into the glorious liberty of the children of God.
22 For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groaneth and travaileth in pain together until now.
23 And not only they, but ourselves also, which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even we ourselves groan within ourselves, waiting for the adoption, to wit, the redemption of our body.
24 For we are saved by hope: but hope that is seen is not hope: for what a man seeth, why doth he yet hope for?
25 But if we hope for that we see not, then do we with patience wait for it.
26 Likewise the Spirit also helpeth our infirmities: for we know not what we should pray for as we ought: but the Spirit itself maketh intercession for us with 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
27 And he that searcheth the hearts knoweth what is the mind of the Spirit, because he maketh intercession for the saints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28 And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em that love God, to them who are th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29 For whom he did foreknow, he also did predestinate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
30 Moreover whom he did predestinate, them he also called: 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and whom he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18 생각하건대 現在의 苦難은 將次 우리에게 나타날 榮光과 比較할 수 없도다
19 被造物이 苦待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被造物이 虛無한 데 屈服하는 것은 自己 뜻이 아니요 오직 屈服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被造物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解放되어 하나님의 子女들의 榮光의 自由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被造物이 다 이제까지 함께 嘆息하며 함께 苦痛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聖靈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嘆息하여 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贖良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所望으로 救援을 얻었으매 보이는 所望이 所望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萬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聖靈도 우리의 軟弱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祈禱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聖靈이 말할 수 없는 嘆息으로 우리를 爲하여 親히 懇求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聖靈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聖靈이 하나님의 뜻대로 聖徒를 爲하여 懇求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者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者들에게는 모든 것이 合力하여 善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者들을 또한 그 아들의 形像을 本받게 하기 爲하여 미리 定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兄弟 中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定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義롭다 하시고 義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榮華롭게 하셨느니라
 

 

전도서 3장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궁극적인 갈망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한 끼 식사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에게 가장 큰 갈망은 밥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병상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갈망은 그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심각한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은 그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가장 궁극적인 갈망은 밥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궁극적인 갈망은 영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가면서 영원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그 갈망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삶의 현장에서 그 갈망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사람은 범죄 하였고, 그래서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실존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사람의 영혼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곧 구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구원을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만 구원을 고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고대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단지 개인적 차원, 한 영혼의 구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주적인 문제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1절을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말씀합니다. 이어서 2절을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우주가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이 우주가 바뀌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까지 모든 피조물은 진통을 겪게 됩니다. 22절을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지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21절을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이라 말씀합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입니다. 죄와 사망권세 속에 초래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썩어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썩어 없어지게 됩니다.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이 탄식에서 해방되는 날을 고대합니다.

 

그 해방의 날이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을 고대합니다. 바로 그 날이 모든 피조물들이 썩어짐에서 해방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 날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 날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그 믿음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믿음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 을 알립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현재의 고난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중량을 비교할 때 사용되는 것이 저울입니다. 현재의 고난에 대한 중량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도 그 중량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한 쪽 저울 접시에 ‘현재의 고통’을 올려놓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도들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고통이라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고통입니다. 현재의 고통은 현재라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은 가벼운 고통이요, 잠정적인 고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현재의 고통에 대해서 ‘중량미달’ 이라는 판정을 내리십니다.

 

다른 접시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올려 놓습니다. ‘나타날 영광’ 은 현재로서는 그 영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영광을 향유한다는 측면에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장차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것과 알아 온 것을 모조리 능가하고 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경험 밖의 것이고, 우리 몸의 속량 곧 부활의 몸 역시 우리 경험 밖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나라를 부분적으로 맛보며 살아갑니다. 이것 역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막 뒤에 숨어 있다가 나타날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됩니다. 이 날에는 하나님나라를 부분적으로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은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는 그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차 나타날 영광’ 이 올려 진 저울에 대해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겁다는 판정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의 고난은 지금 겪고 있는 것, 지금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것, 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끊임없이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것, 보고 있지 않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24절과 25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말씀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은 고난에 대한 자세가 다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은 고난을 마치 하나님나라로 가는 ‘징검다리’ 로 삼습니다.

 

징검다리는 개천이나 물이 괸 곳에 돌덩이나 흙더미를 드문드문 놓아 만든 다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징검다리는 중간에서 양쪽의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의 비유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마치 징검다리 삼아 건너 갑니다.

 

콜룸부스는 신대륙 탐험을 준비할 때 모두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콜룸부스는 그 비웃음 속에서 끝내 신대륙 탐험을 위한 닻을 올렸습니다. 항해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난관과 어려움에 봉착할 때 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 올렸습니다. 결국 그는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마치 콜롬부스는 항해 과정 중의 어려움들을 신대륙 발견의 징검다리로 삼은 것입니다.

삶은 하나의 항해와 같습니다. 사람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들을 하나님나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외롭습니다. 그것이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혼자 당하는 고난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26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험악한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계속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세상에 보이는 부귀, 영화, 쾌락은 항상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죄에 빠져 낙심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우리의 연약함은 기도하고 싶어도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왔다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중얼거리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가 일어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의 죄 문제에 대해서 탄식하시며 변호하시며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위해 탄식하시며 변호하시며 친히 간구하십니다.

 

27절을 보면,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간구하심이니라.’ 는 말은 ‘누구누구를 위하여’ 라는 ‘휘페르’ 라는 말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다.’ 라는 ‘엔팅카노’ 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성령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성도를 위하여, 그들의 연약함에 대하여, 그들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변호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완전한 구속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성령께서 기도하시니 성도들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성령께 의지해서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성도들은 기도하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몰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고,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기도가 막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히는 기도를 뚫어 주십니다.

 

설사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의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지근하게 있다가 그냥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성령께서는 그 시간에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남기고 있는 죄와 허물만 보면 낙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자아는 끊임없이 나의 죄와 허물로 인해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회개하는 사람이지,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자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책감의 뿌리에는 교만이 심겨져 있지만, 회개의 뿌리에는 용서에 대한 믿음이 심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견고해 집니다.

 

삶은 하나의 항해와 같아서 곳곳에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거센 풍파를 만나기도 합니다. 거대한 빙산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센 풍파나 거대한 빙산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알게 하십니다. 이 세상의 거센 풍파와 거대한 빙산도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중간 중간에 사연은 있지만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을 꺾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거센 풍파와 거대한 빙산을 목적지에 다다르도록 하는 징검다리로 삼습니다.

 

사람은 거센 풍파 속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거대한 빙산을 만날 때 하나님께로 숨게 됩니다. 그래서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모든 것이란 ‘선과 악’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는 신자의 구원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사용됩니다. 그것이 거센 풍파이든, 거대한 빙산이든 신자의 구원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됩니다. 그래서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것은 버릴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나의 죄와 허물마저도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바라보게 만드는 하나님의 손길로 사용됩니다.

 

29절과 30절을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29절과 30절을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정하심은 영원 전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의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롭다 하심과 영화로움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죄인인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영화로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즉 영화로움은 구원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영화로움은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신대륙과 같은 것입니다. 콜롬부스에게 있어 신대륙은 존재했고, 결국 그곳에 갔듯이, 그리스도인에게 미지의 세계인 신대륙 곧, 부활의 영광은 존재하며, 결국 그곳에 가게 됩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의 일로 많은 고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에 머물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충실하며 본분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충실하며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충실하며 본분을 다하는 것은 부활하여 하나님나라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라는 것은 너희가 가장 우선 시 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소득 없는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에 시간을 소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득 없는 것은 이 세상 문제로 고민하고, 거기에 온통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