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제가 어느 모교회에서 사역할 때 일입니다. 그 교회 관리집사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 집사님은 관리집사로 일하기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고로 인해 뇌를 심하게 다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고력이나 판단력이나 기억력이나 순간 대처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뒤떨어집니다. 제가 그 집사님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신경계통에도 손상을 입어서 본인이 콧물을 흘려도 콧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 집사님은 다니던 회사에서 노조간부였는데, 회사에서는 눈에 가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사측에서 음모를 꾸몄는데, 그 음모로 인해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 집사님에게 이 사건은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집사님은 교통사고가 계기가 되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저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이 자신의 신체기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거의 매일 뇌손상으로 인한 육신적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 집사님이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분을 붙들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얘기할 때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있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뇌손상으로 인해 유창한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처럼 ‘기도에 관한 책’을 읽어서 방법론적으로 좋은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 성경적으로 훌륭한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 분은 기도제목을 적어 놓지 않으면 기도내용을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풍부한 내용으로 기도하는 분에 비하면, 그리고 기도의 영성이 있어서 너무나 훌륭한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종에 비하면 이 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그 분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눈물로써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 분이 상상할 수도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기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기도 중에 내 안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성령의 기도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몇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고 있는 상태이며, 하나님께 묻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기도제목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계시며 저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사람에게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완벽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의 영성이 뛰어나고 성경적인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면 완벽할 수 없습니다. 어딘가 빈틈이 있고, 어딘가 욕심이 있습니다. 어딘가 성경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드리는 기도를 씨앗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기도를 온전케 하십니다.
기도자체는 영적노동입니다. 그러나 나의 기도를 온전케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자체에 대한 부담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눈물로써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눈물보다 더 큰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성령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다 아뢰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다 아뢰십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는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허물 많은 기도를 승화시켜 나가십니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이끌어 나가십니다. 우리의 삶은 죄와 허물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 투성이인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저의 하루 삶만 돌아보아도 실수와 허물 투성이입니다. 사람에게 말 실수 했던 것, 사역적인 측면에서 허물을 남겼던 것, 중심을 지키지 못했던 것, 하나하나 나열하면 빽빽이 기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남긴 죄와 허물들만 바라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남긴 허물과 죄로 인해 미칠 영향들을 고려하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제가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비록 저는 죄와 허물을 남겼지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끝나고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면 후회가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때 왜 내가 그렇게 했을까? 라는 고민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때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후회가 되는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영적 유익을 주시는 재료로 삼으실 것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후회가 되는 것들이 있지만 그 후회가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 보다 앞서 가서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기도를 드리려고 애쓰기 전에 내 안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삶을 살려고 애쓰기 전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한 기도를 드리고, 완벽한 삶을 살았다면 우리는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자기 의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허물 많은 내 기도를 완성시켜 나가는 성령님을 알고, 죄와 허물 많은 인생일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은혜의 주님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28절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합하여’ 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그 어느 것 하나도 빼어놓지 않고 모든 것을 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에서 어떤 것은 빼어놓고 싶어 합니다. 특히 그것이 죄와 허물이거나 후회되는 것이라면 빼어놓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빼어놓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합하십니다. 다 합하여 이루어 내시는 결과물은 ‘선’입니다. 우리가 빼어놓고 싶어 하는 그것도 하나님에게는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소망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은 그 과정에 죄와 하물은 있어도 실패는 없습니다. 완성만 남아 있습니다. 그 완성된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삶이 스스로 실패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실패작이라고 생각을 해도 하나님은 완성작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