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장, 남은 자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4절 말씀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입니다. 엘리야는 자신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힘이 되는 소식을 전해 주십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7천 명 외에는 바알에게 모두 무릎을 꿇었다는 말씀입니다. 7천 명 외에는 바알이 너무 좋아 입을 맞추었습니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그들은 바알이 너무 좋아 입에 바알의 입에 키스를 했습니다. (kissed)
엘리야 입장에서 보면, 그 7천명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절을 보면, 주의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마지막에 나만 혼자 남았는데, 제 목숨도 위태롭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자기도 죽게 되면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음을 아뢰고 있습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 명을 남겨 두었음을 말씀하십니다.
7천 명은 적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다 죽고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엘리야에게 7천 명은 희망의 숫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을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오늘날의 바알은 무엇이며, 오늘날 남은 자는 누구입니까?
성경에서는 우상으로 숭배되는 ‘신’ 중에서 ‘바알’ 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숭배되고 있는 ‘바알’ 신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바알은 ‘풍요’ 의 ‘신’입니다. 농사가 주업인 가나안 땅에 가장 걸 맞는 ‘신’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알을 숭배할 때 숭배 방식이 이렇습니다. 바알 신전에는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여자창기도 있었고, 남자창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 바알을 숭배하는 방식은 난잡한 ‘성행위’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행위를 하면 토지가 늘어나고, 농산물을 많이 거둘 수 있으며, 가축이 많아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알의 사제들은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피를 흘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바알이 비를 내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알이란 원래 ‘주인’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주인’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주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알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오늘날도 바알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유혹합니다. 사탄은 바알의 모습을 각 시대에 따라 적절히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서유럽에서 나타난 문화운동을 ‘르네상스’ 라고 합니다.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신 중심의 사상과 봉건 제도로 개인의 창조성이 억압당하던 중세사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운동은 문화, 예술 분야뿐 아니라 정치, 과학 등 사회 전반적인 영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르네상스에 관한 지식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의 근본정신을 ‘인문주의’ 라고 합니다. ‘인문주의’ 는 라틴어 휴마니스타(humanista)에서 다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성품과 능력 그리고 인간의 현세적 소망과 행복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는 정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 또는 인도주의(人道主義) 라는 말도 같은 말입니다.
‘인문주의’ 가 사람들로 하여금 꿈꾸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세적 소망과 행복이 가장 귀중한 가치임을 주장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 정신도 ‘인문주의’ 가 주장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고상한 가치를 느끼고, 심지어 아름다움까지 느낍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운동의 배경에 사탄의 역사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하나님이 근본이 되지 않고, 인간이 근본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하나님나라가 소망이 되지 않고, 이 땅이 소망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살며,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두도록 합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운동은 이 땅에 정착하며,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도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문주의, 혹은 인본주의는 오늘날에도 독버섯처럼 퍼져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었다.’ 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일상의 삶입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이 땅의 삶에만 충실했을 뿐, 하나님은 뒷전에 두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삶에만 충실하고, 하나님을 뒷전에 두다 보니까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문주의, 혹은 인본주의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고, 이 땅의 행복만을 추구하려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문(文)은 무(武) 보다 강하다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글은 무력보다 강합니다. 인간의 의식세계를 잠식할 수 있다면 칼을 사용하는 것 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술, 전략도 인간의 의식세계를 잠식하는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에는 동성애자 목사를 이미 허용한 상태입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결혼 허용에 대한 요구들의 맥락에 무엇이 있습니까? 거대한 인문주의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성애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거의 실현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는 거대한 인문주의 물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2장 26절과 27절에서는 여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불의에 대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자유, 평등이 기준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문주의, 인본주의가 교회 밖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급속히 잠식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경우 이런 사태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다지 멀지 않은 시간에, 예배당에서, ‘오직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는 설교를 듣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 평등에 어긋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 평등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구속당하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참된 설교자는 목숨을 걸고,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고 설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설교자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명을 남겨두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꺼져 가는 등불 같다가도 또 다시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린다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 명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자’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의식 속에서 인간중심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는 말이 있습니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조금씩 젖어 들기 때문에 여간해서도 옷이 젖는 줄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조금씩 찾아든 인본주의 생각이 결국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등지게 만드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사람 때문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나와야 합니다. 대구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 휴가 중에 부목사가 새벽 설교를 했더니, 새벽 기도회 참석자 수가 평소 보다 절반 정도 밖에 안 된 교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교회 내에 뿌리 내린 인본주의의 병폐입니다. 새벽기도회는 개인적으로 깊이 기도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 시작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어떤 한 맺힌 기도 제목을 가지고 응답 받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결코 목사 얼굴 보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례일 따름입니다. 이 외에도 교회 내에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인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 구원, 부활,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탄이 사막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자기 영광을 위해서든, 자기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든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미 성경을 봉독할 때나, 성경을 교독할 때,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설교라는 것은 이미 선포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자와 성도가 다함께 말씀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유하고 나누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설교자와 성도가 똑 같이 죄인 된 신분으로서 조심성을 가지고 그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