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장, 섬김
섬김
고린도전서의 13장 3절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2절을 보면,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 말씀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무런 존재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 은 모든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 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사랑이 대단한 희생과 헌신을 보여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때로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 굉장한 희생을 감내(堪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과로만 본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보다 더 큰 희생을 감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불을 붙여 놓은 것처럼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전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 준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말씀합니다.
사랑이 어디 있는가 하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사랑에 있습니다. 이것 외에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떠난 사랑은 그 사랑이 어떤 형태를 띠든지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뜻합니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서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모습을 띠든지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희생의 모습을 띤다 해도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한다면, 내 스스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사랑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섬김’ 의 시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섬기고자 한다면, 내 스스로는 섬길 수 없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섬김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섬김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물질로 섬긴다 해도, 그리스도를 통한 섬김이 아니라면, 그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이고, 애정을 쏟고, 열정을 쏟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통한 섬김이 아니라면, 그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내 스스로 누군가를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비로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섬긴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첫째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을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중간단계를 거치라.’ 는 말씀입니다. 그 중간 단계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것도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김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내가 전하는 것이 아님을 기정사실화하고,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내가 봉사하는 것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다시 말해, ‘섬김’을 통해 내가 영광 받게 된다면, 그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셔야 그것이 ‘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섬긴 것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되면, 그것은 영적인 섬김입니다.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인간적인 섬김이 아니라, 영적인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섬김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날 때, 그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가 됩니다.
인간적인 섬김은 아무리 큰 섬김을 한다고 해도,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성도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 섬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도 기쁘게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섬김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나와 여러 성도들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심을 알고 섬긴다면 영적인 섬김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섬기기 위해서는 형제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말씀합니다. 내가 아무리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형제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하거나 힘들게 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선하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하거나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는 속된 것이 아니지만, 상대방이 속되게 여긴다면 속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음식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성도가 우상의 제물과 연관시켜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가진다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단한 사람입니다. (고전8:13)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그 사람을 섬기는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그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두었습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신교 신자들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을 보는 한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을 보는 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신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라면 어떤 경우에도 술은 입에 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맥주나 소주나 막걸리는 안 되지만 포도주는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소주나 막걸리를 마셔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술과 담배 문제를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로 보지만 유럽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주 유명한 신학자 중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쓴 책, 표지에 자신의 사진을 올려놓았는데, 그 사진은 자신의 연구실에서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진을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들이 본다면 마음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 중에는 선지국을 안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 는 말씀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 앞에서는 그 사람의 신앙양심을 위해 선지국도 먹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을 섬기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술, 담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고, 선지국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신앙양심을 위해서 그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음식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신학적 소견을 가지고 있고, 자기 믿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형제를 근심하게 만든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해서 이것이 선하다고 해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을 보면,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형제를 섬김에 있어 형제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형제가 시험에 들까를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성령 안에서의 섬김이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섬김에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17절에,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먹는 문제로 인해 다른 형제의 마음에 근심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본질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것은 비단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형제의 마음에 근심을 주는 모든 문제를 포함합니다.
교역자는 교역자끼리 서로 마음에 근심을 주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교역자와 성도끼리도 서로 마음에 근심을 주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끼리도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권위로서 상대방을 짓누르려 해서도 안 됩니다. 일방적인 자기주장만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근심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속임과 기만의 말들로 상대방에게 근심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교회는 교회 분위기가 좋습니다. 영적인 생동감이 흐르니까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본질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자기 말이 모두 옳다고 해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섬김’ 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섬김은 좋은 것입니다. 섬김은 기쁜 것입니다. 섬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고, 상대방을 기쁘게 합니다.
넷째로, 낮아짐을 통한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셔서 사람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리 낮아져 봐야 그냥 사람입니다. 사람이 낮아져서 개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낮아질 데까지 낮아져도 그냥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낮아지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를 낮춘다고 해도 큰 일 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높이면 큰 일 납니다. 직위나 자리가 있어 그 권위로 상대방을 짓누르면 자기가 올라가는 것 같지만 결코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로 상대방을 짓누르는 사람은 오히려 존경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려 하는 사람은 오히려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참다운 권위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자신을 높일 때는 권위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낮출 때는 권위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참으로 섬길 줄 아는 사람은 권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얻습니다.
18절은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18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로써’ 라는 말은 이렇게 함으로써 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마음을 살피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영, 구원의 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는 밖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을 보면,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접대라 해도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접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 있는 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의 마음이 상할까를 걱정하기 전에, 힘없고 소외 되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상할까를 염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섬김의 영성입니다.
힘없고 소외 되어 있는 사람의 마음을 걱정하고, 그들을 섬기고자 하는 교회는 온 교회가 기뻐합니다. 그러나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섬기고자 하는 교회는 온 교회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당사자들만 기뻐할 뿐입니다.
온 교회가 기뻐하는 섬김은 약자에 대한 섬김입니다. 약자에 대한 섬김이 있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온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소외된 사람을 섬기는 교회가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섬김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섬김의 불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의 촛불로 다른 초에 불을 붙이려고 할 때, 빛을 나누어준다고 해도 잃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불은 나누어주면 그 밝기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어두운 구석구석에 나누어 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20장 27절을 보면,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말씀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부족하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에 비쳐지는 우리 심령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이 빛은 아무리 작더라도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 빛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줄 수 있다면 그 밝기는 두 배가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김에 있어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섬김의 촛불을 밝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의 촛불이 밝혀질 수 있다면 그것이 두 개의 촛불이 되고, 두 개의 촛불은 네 개의 촛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도 모른 사이에 수 백 개, 수천 개의 촛불로 발전해서 온 교회를 환하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