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장, 화평의 왕 예수그리스도
에베소서 2장, 화평의 왕 예수그리스도
우리나라 인사말은 “안녕하십니까?” 입니다. “안녕(安寧)하십니까?” 는 “아무 탈 없이 편안 하십니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십니까?” 란 뜻입니다. 아무 탈도 없고,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안하면 살아갈 맛이 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말은 샬롬(Shalom)입니다. 샬롬은 ‘평화’ 라는 뜻입니다.
샬롬은 “사람이 존엄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모든 삶의 조건” 입니다. 경제적인 배경 뿐 아니라,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모든 조건들이 샬롬 곧, 평화입니다. 병든 자에게는 건강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폭력 없는 가정을, 직장을 잃은 사람에게는 직장을 주는 것이 샬롬 곧 평화입니다.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쉼을 주는 것, 전쟁으로 고통 받는 국민에게는 전쟁이 없는 땅에 살도록 하는 것이 샬롬 곧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진다 해도 온전한 샬롬은 아닙니다.
영적 존재인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다면 온전한 샬롬이 아닙니다. 온전한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찾아옵니다.
화평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방과 관계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 관계성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상대방을 몰라도 화평이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알아도 그 관계성이 평화롭지 못하면 화평이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식인종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잘 모릅니다. 그 사람들을 모르기 때문에 화평이라는 말을 사용 못합니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합니다. 위치는 가깝지만 역사적으로 좋은 관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7년간의 전쟁(1592~1598), 36년간의 식민통치(1910~1945)가 그것입니다. 지금도 독도에 대한 영토권 분쟁으로 좋은 관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일본은 화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은 하나님과 화평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핍박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평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화평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샬롬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된 사람의 영혼이 샬롬입니다.
11절에서 13절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방인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며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가 이방인들입니다.
이런 이방인들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했습니까? 13절을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사람들을 십자가를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14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사건을 ‘샬롬’ 곧 ‘평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떠난 믿음은 없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신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배울 만큼 배운 바울이 오직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했습니다. [행22:3]
우리는 일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십자가에 대해 다 알 수 없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그 십자가 사랑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랑은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신약성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뿌리요 줄기 입니다. [근간(根幹)-뿌리와 줄기]
이단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뿌리를 뽑고 이러한 믿음의 줄기를 흔들어 놓습니다.
성경은 밝힙니다. 구원과 멸망의 분기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이 있고, 넘쳐나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른다고 해서 내 영혼이 멸망 받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세상 모든 지식을 안다고 해서 내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의 분기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이요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입니다.
이단은 복잡한 논리와 교리를 앞세워 기존 신자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복잡한 논리와 교리가 아닙니다. 복잡한 논리와 교리를 알고 분석해야 구원받는 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진한 어린아이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도를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믿고 받드는 자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한 마디로 화평입니다. 이 사실을 단순히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세상에서의 화평과 십자가상에서의 화평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화평은 상호적입니다. 쌍방간에 화평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의 화평은 쌍방간이 아닙니다. 십자가상의 화평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 미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만듭니다. 성막을 구성하는 것 중에 휘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막의 휘장은 세 개입니다. 그 첫째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경계를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성막 문에 걸어두는 것이고, 셋째는 바깥뜰 문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휘장이라 함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장소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 증거궤가 있습니다. 증거궤는 언약궤, 혹은 법궤라고도 합니다. 증거궤 안에 있는 것은 세 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성품을 나타내는 십계명 두 돌판이 있습니다. 하늘 양식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만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민17:8,10]
이 세 가지가 증거궤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증거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습니다.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인데, 시은좌라고 합니다. 시은좌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자리입니다. 이러한 속죄소가 지성소 안에 있는데, 이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것이 휘장입니다. [출26:31-36, 36:35,36]
휘장이 뜻하는 것은 죄 있는 인간이 속죄제사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마28:51] 예수님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비로소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 화평이 어떤 화평입니까?
첫째,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평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 마다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은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천국은 이것보다 더 발전된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보좌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는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완전한 화평인 것입니다. [고전13:12]
둘째,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평입니다. 죄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서로를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범죄의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시켰고, 하와는 범죄의 책임을 뱀에게 전가시켰습니다. 이렇게 정죄하는 마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 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 마다 다른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서로 간에 범죄 하면 용서하는 화평입니다. 늘 범죄하고 늘 용서하는 화평입니다. 천국의 화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화평은 완전한 화평입니다. 천국에서는 서로 간에 죄 자체를 짓지 않는 완전한 화평입니다. 용서할 것도 없고 용서받을 것도 없는 완전한 화평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즐거워하며 서로 기뻐하는 완전한 화평입니다.
셋째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화평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받게 되었고, 먹이 사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땅은 없어집니다. 먹이사슬도 없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1장1절과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것이 인간과 자연사이의 완전한 화평입니다.
십자가는 이러한 화평을 이룬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평,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평, 사람과 자연사이의 화평을 이룬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또 하나의 화평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화평입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가책과 후회 속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자기 자신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담을 십자가 안에서 허물어야 합니다.
15절과 16절을 보면,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었습니다. 경계선이 있다는 것은 둘로 나뉘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막힌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그 경계선이 없어졌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경계선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화평 곧 샬롬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일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단지 이 화평은 믿는 자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안식을 누립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을 때, 그 심령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시편 6편6절을 보면 죄로 인한 그 고통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로마서 7장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죄로 인한 고통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다윗과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났습니까? 어떻게 탄식과 정죄에서 벗어났습니까? 주님의 용서로 인해 벗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에 정죄로 부터 벗어났습니다. 주님께서 화평을 선포했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합니다.
저는 커피를 무척 좋아해서 하루에 평균 4잔 이상을 마십니다. 새벽기도회 직전에 한 잔, 출근 하자마자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저녁 먹고 한 잔을 마십니다. 커피를 방금 마셨는데 어떤 분이 커피를 또 권하면 가급적 사양하지 않습니다. 또 마십니다.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은 피로가 풀리면서 마음이 고즈넉해 지면서 풍요로움을 느낍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커피는 세상이 주는 여러 평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가정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도 평안을 느낍니다. 가정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도 기분이 좋아서 평안을 느낍니다.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쉬는 그 시간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분은 음악을 듣는 그 순간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이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입니다. 잠시잠깐의 평안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이 영원한 평안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은 단순한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내 영의 평안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영적존재입니다. 영이라는 것은 존재의 가장 심오한 부분,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우선 영이 평안해야 합니다. 영이 평안해야 마음이 평안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몸도 평안합니다.
영의 평안은 십자가 안에서 찾아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이 허물어진 것을 믿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화평의 왕이십니다.
화평의 왕이 우리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화평이 없습니다. 주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평이 없고, 주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화평이 없습니다.
레위기 26장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화평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미가서 4장2절을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 산에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고 말씀 합니다. 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야 하고, 왜 하나님의 전에 이르러야 합니까? 화평이 여호와의 산에 있고, 평화가 하나님의 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인생의 의문점들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순이 많습니다. 불의한 자가 잘 살고, 의로운 자가 못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보다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 있을 수 없는 사건들을 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는가?” 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내 인생의 기구한 사연을 모두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인생은 결국 어디로 가고, 내 영혼은 결국 어디로 갈까 고민이 됩니다. 시편 73편에 이러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모든 고민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 답변을 얻습니다. 시편 73편 17절에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불의한 자, 권모술수에 능한 자의 종말을 깨달았다는 노래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내 인생의 모든 의문점들이 풀립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모든 의문점들이 풀립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시은좌에 나갈 수 있습니다.
시은좌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시은좌에 내 인생의 모든 문제, 내 영혼의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그 곳에 온전한 화평, 곧 샬롬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시은좌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심령이 곤고할 때 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불화가 생기고 어지러움이 발생할 때 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평화의 때에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 심령이 평안하다 해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막힌 담을 허무신 주님의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세계는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말씀합니다. 누리는 것은 그것이 넘치도록 즐기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평이 넘치도록 즐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주옵소서. 그 화평의 잔이 넘치게 하옵소서.” 우리는 그 화평의 잔을 마실 때 마다 십자가의 세계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2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말씀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가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서 하나가 되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음으로서 하나가 됩니다.
15절과 16절 말씀처럼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은 것이며, 하나의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는 어떻게 신분이 바뀝니까? 19절을 보면,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말씀합니다.
원래는 외인이었습니다. 이제는 외인이 아닙니다. 원래는 나그네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없기에 소망이 없던 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있기에 소망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룬 화평, 곧 샬롬입니다. 20절에서 22절을 보면, 십자가상에서 이룬 화평을 건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22절까지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건물 비유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곧 완전한 하나임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이 건물이 어떤 건물입니까? 우선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이 모퉁잇돌을 기반으로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된 상태에서 우리는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 갑니다. 놀라운 영적 비밀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일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5절을 보면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말씀합니다. 그리고 7장6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말씀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사는 집이 아니라 인간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49절을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말씀합니다. [참조:행17:24]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는 예루살렘성도 아니고 성막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할 처소는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안식하실 처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지막 날 이 건물은 완공이 됩니다. 그 날 하나님은 완전한 성전이 된 우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히브리서 4장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역사를 마치시고 제7일 째 안식하셨습니다. [창2:3] 인간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은 재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창조의 역사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창조의 역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성전이 되게 하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이 창조의 역사가 마치는 날 하나님은 또 다시 안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