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 술 醉하지 말라 이는 放蕩한 것이니 오직 聖靈으로 充滿함을 받으라
18 And be not drunk with wine, wherein is excess; but be filled with the Spirit;
에베소서 5장,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경에서 인간이해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자연인(自然人)입니다. 자연인은 모태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일단 이 세상에 출생하는 모든 사람은 자연인입니다. 둘째는 중생한 사람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 따르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 을 중생한 사람, 혹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이 세상에는 자연인과 중생한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인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고, 중생한 사람은 성령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연인은 성령이 없이 살아가고, 중생한 사람은 성령으로 살아갑니다. 본문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는 명령은 중생한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을 위해 사용된 표현방식이 대조법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합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대조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증세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행2:4]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보고는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할 정도였습니다.[행2:13]
자연인은 술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비교적 이성적 판단에 따라 살아갑니다. 중생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한 사람이 성령에 취하지 않는다면 자기 생각을 쫓아 살아갑니다.
술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고 성령에 취하는 것은 신령한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에 취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성령에 취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연인이 술에 취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냥 술을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마시듯이 성령을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자(人格者)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이미 성령이 계십니다. 이미 계신 성령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많이 드러낼수록 성령 충만하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장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 의 문제입니다.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 그 영을 얼마나 드러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드러내는 것은 믿는 자의 자기 책임성이 있습니다.
자기 책임성에 대한 말씀이 요한계시록 3장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를 대상으로 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문을 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을 믿고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령 안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잔치와 같은 교제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내가 문을 열어줄 때 주님께서는 들어오셔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 줄 때 들어오십니다.
사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속이고 들어옵니다. 때로는 강제로 들어옵니다. 유혹을 하기도 하고, 미끼를 던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단이 들어오는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단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두드리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 주면 주님께서는 들어오셔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충만할 수 있고, 주님은 누구나 성령충만하기를 원합니다.
본문 18절은 명령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가 명령어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도 명령어입니다. 성령 충만은 받아도 좋고, 받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 충만’ 은 모두가 받아야 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 영적 안일에 빠져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에 대한 오해는 단지 이것을 은사적 개념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한다거나 영을 분별한다거나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병을 고친다거나.... 이러한 것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령 충만의 극히 일부분이지 전체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주님과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부터 힘을 공급받고, 주님에게서 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모든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사단이 더 이상에 내 발목을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가 꺾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거듭나게 한 후,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는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과 함께 성령님은 그 사람 속에 내주하십니다. 내주하시면서 성령은 그 사람에게 끊임없이 간섭하시며 역사하십니다.
그러한 성령의 간섭과 역사는 내가 문을 열어 줄 때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강력하게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문을 열어 주면 성령께서는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요한복음 15장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세례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바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생에 단 한 번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복적인 것입니다. 어제 성령충만했다고 해서 오늘 성령충만한 것이 아니고, 오늘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내일 성령충만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는 말씀이 성령충만은 반복적으로 받아야 함을 뜻합니다. 한 번 술을 마셨다고 해서 늘 취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취해 있으려면 오늘도 마시고, 내일도 마셔야 합니다. 매일 매일 마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늘 취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매일 매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19절을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역시 명령입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이를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령의 불길을 끄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 이란 성령의 불길을 끄지 않고, 성령의 불길이 내 속에서 활활 타오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속성은 활활 타오르는 속성이고, 나의 죄악 된 속성은 그 불길을 끄려는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죄악 된 속성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첫 단추는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회개가 없는 성령 충만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과거에는 연탄보일러였습니다. 저도 연탄을 갈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가장 밑에 있는 연탄불이 꺼지기 전에 새 연탄을 갈아 넣어야 합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불은 완전히 꺼집니다. 성령충만을 매일 받는다는 것도 이것과 비슷합니다. 성령의 불길이 꺼지기 전에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타이밍을 놓쳐 가장 밑에 있는 연탄마저 불길이 남아있지 않으면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합니다. 수퍼에서 번개탄을 사 와서 다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집에 번개탄 재고가 없고, 아직 수퍼가 문을 여는 시간이 아니라면 냉방에서 지내야 합니다. 성령의 불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꺼진 상태에서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든가 무슨 수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성령의 불을 끄게 됩니까? 어느 순간 의심이 생깁니다. 마음에 의심을 갖게 되면 성령의 불이 꺼집니다. 어느 순간 불신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내 인생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불신에 빠집니다. 그러면 성령의 불이 꺼집니다.어느 순간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불길이 꺼집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치 않기 위해서는 사단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단은 틈을 타서 우리 마음에 가라지를 심습니다. 교만을 심고, 자만을 심고, 불신을 심습니다. 죄의 소욕을 심습니다. 성령의 불을 끄는 것이 사단이 노리는 것 중 하나입니다.
성령은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중심에 모셔 들이면 성령은 내 중심에 오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첫 자리에 모시면 성령은 첫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중심에 모셔 들이지 않으면 그 분은 내 중심에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첫 자리에 모시지 않으면 성령은 끝에 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삶의 가장자리에 성령을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스스로 활활 타오르십니다. 내 인생을 역동적으로 이끄시고,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준다고 어떤 부흥사는 교인을 향해서 손을 휘저으며 “휙”하고 바람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으라’ 고 외칩니다. 사람이 성령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처럼 쇼(show)를 합니다. 이것은 무지의 소치(召致)입니다. 성령은 사람이 조종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쇼를 하는 것처럼 성령을 부른다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편의에 따라 역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내 삶 속에서 그 분을 인정하고 드러낼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내가 죄를 회개하고, 긍휼을 구할 때 역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나의 모든 인간적인 의지를 포기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할 때 역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내 속에 혈과 육이 살아 있는 한 역사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 속된 마음과 인간적인 것들이 머리를 쳐들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삶 속에, 교회 속에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흥집회에서 대단한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만일 마음속에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랑하는 사람 들 중에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영혼들, 지옥 불로 떨어지고 있는 영혼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는 신령한 사람이라는 의식 속에, 자기만족과, 자기 도취감 속에 살아갑니다. 은근히 다른 성도들을 무시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 충만’ 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성령 충만’ 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성령 충만’ 의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할 때 ‘성령 충만’ 을 주십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 자기 삶의 안위만을 추구하면서 ‘성령 충만’ 을 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모든 자는 ‘성령 충만’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육적 자아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하며,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죄성이 무엇인지? 내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불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온전한 임재가 있기를 기도해야 하며, 소망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지치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모든 짐을 지셨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인생의 짐을 갈수록 가볍게 하십니다.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시고, 하나님나라에 눈을 뜨게 하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십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근본 목적은 아닙니다. 근본목적은 아니지만 성령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기쁘게 합니다. 왜냐하면 참다운 기쁨과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져 혼자 기뻐하라고 성령 충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섬기게 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 충만’ 속에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을 보면,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말씀합니다. 성령의 역사에서 ‘죄 씻음’ 을 뜻할 때는 ‘물과 성령’ 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7장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말씀하십니다. 생수의 강은 성령의 강이며, 성령의 강은 목마른 영혼에게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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